편집국장 공인배

전투시인 김남주의 사후 20주기(2월 13일)를 마주한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갑오농민전쟁 120주기다. 현장의 부조리에 맞선 저항 정신과 더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생존의 문제가 서로 겹치며 '공동선'이라는 거대한 교집합 영역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져 보이는 지점이다.

이 영역은 우리 사회에서 이미 담론으로 자리잡았으며 점증하고 있기에 우리는 두 사람에게서 받은 불을 우리 몸의 기름으로 밝히는 책무를 회피할 수 없다.

김남주나 전봉준은 폭압과 불통, 독점과 착취가 임계점을 넘긴 시대가 낳았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체제적 노예를 내면화한 자신의 틀을 깨고 견고한 연대를 구현해야 한다는 지상명령을 건넨다.

사실, 우리에게 평등과 연대는 낯선 것이 아니다. 디오게네스의 설파처럼, 만물이 각자 만물을 품고 있듯이 인간은 법 이전에 평등하며 우리 자체가 전태일이 말했던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가 연대를 이루고 있으니까.

김남주는 '봄'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의 날개, 나의 노래는/ 나의 햇살, 나의 바람, 나의 혼은/ 어디에 어디에 내가 있는가?/ 황혼에 쓰러진 거목이 되어 버림받고 있는가/ 고여 있는 바닥 어둠의 뿌리가 되어 썩어가고 있는가/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흘리고 있는가.

'나'와 같은 우리가 억압 속에서 자유를 포기하고 제한된 평등에도 굴종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거친 자화상이다. 김남주의 어법에 따르면, 전봉준은 제 날개로 어둠의 동굴에서 떨쳐나와 제 혼으로 햇살과 바람을 누리는 자유의 나무가 되어 피를 흘린 것이리라.   

그런 까닭에 김남주는 자신을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해방전사/ 내가 아는 것은 다만/ 하나도 용감 둘도 용감 셋도 용감해야 한다는 것/ 투쟁 속에서 승리와 패배 속에서 그 속에서/ 자유의 맛 빵의 맛을 보고 싶다는 것 그것뿐이다.

이기든 지든 자유를 얻었을 때의 빵 맛을 보고 싶다면 물러설 줄 모르는 투쟁을 감행해야 한다는 외침이다. 굶주림과 추위를 딛고 사나운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무장을 잘 해야 한다. 무장의 토대는 신념이다. 신념은 나와 주변에 대한 문제인식에서 출발한 합목적이다.

우리는 전봉준의 시대와는 달리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시대에서 살고있다. 김호기의 '지식인 리포트'에 근거하면, 우리 사회는 권위적 정치구조, 천민적 자본주의, 이기적 시민사회가 중첩되고 접합된 사회다.

그 기반을 딛고 선 권력은 지극히 전략적이다. 노골적으로 이빨을 드러내지 않으며, 한사코 합법을 행사한다. 정권의 불통은 시장(市場) 혹은 진영과 숫자 논리로 방패삼고 있다. 연간 나랏돈 126조원을 대기업에 퍼주면서도 부자증세 요구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묵살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그 앞에서, 보편적 복지를 지향하는 사회적 담론은 한정된 국가예산을 위협할 뿐이며, 경제민주화 담론 역시 대기업의 투자의욕을 꺾고 성장을 가로막을 뿐이다. 서민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짓눌리고 착취 당하면서도 벼랑끝을 전전한다. 언제든지 시장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위협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고도화된 야바위 수법이 우리 안방을 현혹한다. 몇 개의 금융기관을 통해 1억건이 넘는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실을 지난 1월 하순 금융당국이 발표한 이후 온 나라가 난리를 치렀다. 그 바람에 필요한 수준의 국정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국가기관의 불법 대선개입 책임론은 불씨마저 꺼진 양상이다.

개인정보 유출은 금융당국이 이미 한 달 전에 포착했었고, 2차피해 우려가 없는 것으로 결론을 도출해 놓고도 느닷없이 발표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여론 진화와 국면전환 수법에는 다양한 소재들이 동원되는데, 엔엘엘 관련 나라 정상들간 대화록 유출이나 골목대장 이석기 기소는 가장 비근한 예가 될 것이다.

김남주가 우리시대를 살고 있다면 더 거칠게 피를 토하며 외칠까. 아마도 전봉준과 그 농민들은 봉기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절감하고 있을 때는 저항이 자기의 일이었지만, '기회균등'이라는 외피를 입은 시장체제와 전략적 통치의 그늘 아래에서 저항은 남의 일일 뿐이다.

승자와 쟁취하려는 자, 혹은 시장 진입을 노리는 자 등 시장주의자들 속의 어떤 이들 또는 그 밖에 있는 이들이 거리로 나가 외치는 것은 또 다른 경쟁으로 치부될 뿐이다. 아니면 떼거리일 따름이다.

무장하고 길 위로 나가 정면으로 맞서라

그 위의 확성기에서는 "대기업이 부를 축적할 때 너는 무엇을 보탰느냐. 무능한 너 자신을 탓하라. 법대로 하자"는 선무 구호가 쉼없이 쏟아진다. 저항 하려는 쪽에서 법이 있을 때 법이 없을 때 보다 더 무력감을 느끼는 이유다.

이런 가치의 혼란은 피로도를 높인다. 공권력이 정당하게 행사되고 있는가를 늘 의심해야 하고, 법이 소수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거나 사용되는지를 감시해야 하는 형국에까지 이르렀다. 이 불안의 근원은 열심히 노력해도 평범한 꿈 조차 이루기 어려운 현장이다.

수많은 염려를 예방하기 위해 세운 복잡다단한 법체계가 시장논리에 예속되어 있다는 의구심은 바로 그 가치의 혼란에서 온다. 이런 지형 위에서 김남주와 전봉준이 깨어난다면 그들은 먼저 자신의 독단성과 평상성을 넘어서는 성찰의 필요성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또 효용가치에 관한 통념을 의심하며, 깊숙이 숨어 있는 현상의 구조를 통찰하지 않고는 우리가 처한 부조리를 타파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할 것이다. 그렇게 신념을 세워 공동체의 허위에 대응하지 않고는 지배의 늪에서 연대의 손을 끌어 올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보편적 가치가 구현될 수 없는 체제라면 깨고 그 밖으로 나가는 수 밖에 없다. 깨고 나가기 위해서는 문을 열어 불완전한 나를 내보내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법이니, 통섭에는 반드시 위험을 감수할 각오가 필요하다.

혁명은 결국, 길 위에서 익명의 사람들에게 자기 의견을 공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용기를 세우고 자기를 가꾸고 타인을 품는 것이기에 그것은 성패와 무관하며 아름다은 것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