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박근혜 체제는 출범 1년을 넘기고서도 여전히 정통성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권력 3부가 진실을 은폐하고 호도하며 왜곡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의심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국정원 그리고 새누리당의 각가지 국면전환 공작과 그 일환의 '종북몰이' 광풍이 대선 부정 의혹을 제기하는 국민들 얼굴에 수차례 휘몰아친 뒤 사법부로 공이 넘겨졌고 한동안 소강상태였던 국면이 다시 요동치고 있다.

사법부가 보편타당한 법리를 일탈한 판결을 잇따라 내놓고 있는 탓이다. 지난 대통령선거 막바지에서 국정원의 댓글 개입 사건 수사 결과를 허위로 발표해 선거에 영향을 미친 혐의를 받았던 김용판 전 경찰청장은 1심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당시 현장에서 수사를 지휘했던 권은희 송파경찰서 수사과장의 양심선언은 날조한 유언비어로 전락했다. 법원은 같은 사건의 수사라인에 있었던 경찰관들의 통일된 진술과 권과장의 진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다수의 증언을 증거로 채택하고 권과장의 증언은 버린 것이다.

사건의 핵심 사안은, 대선 3일 전에 이뤄진 마지막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박근혜 후보와 문재인 후보가 국정원 댓글 문제로 격렬한 공방을 벌인 직후인 이날 밤 11시에 경찰이 '국정원 피의자는 혐의 없다'는 중간수사 결과를 기습적으로 발표한 사실이었다.

심리의 쟁점은 김용판 경찰청장이 이를 통해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있었느냐 였다. 이날 경찰 발표는 국민들의 뇌리에 박근혜의 억울한 입장과 인권을 중시하는 이미지를 각인시켰고, 문재인은 공연히 한 여성에게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감금을 지휘한 파렴치한 자이며 헛소리로 혼란을 야기한 네거티브 선거전의 주역으로 낙인했다.

하지만 법원은 경찰의 발표 시기와 내용이 부적절했던 것을 인정하면서도 피고가 대선에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법원의 이같은 판결에 검찰도 일조했다. 김용판을 위시한 수사라인과 새누리당 핵심 실세의원- 국정원-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의 조합상황실장 등을 넘나드는 통화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정원의 대선 개입이 국민적 공분을 사 국정원 개혁론이 분출하던 와중에, 국정원이 터뜨린 이석기 등의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법원의 판단은 어땠는가. '유죄'를 선고했다.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을 적용한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법원은 국가정보원 제보자의 진술이 일관되고 구체적이며 진술 태도 또한 자연스러워 신빙성이 있다고 판결문에 적었다.

나아가 검찰이 국정원에서 받아 법원에 제출한 증거인 녹취록의 720곳이 짜집기된 오류가 드러났는데도 법원은 이를 결정적 증거로 채택했다. 그 오류가 중요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데도 법원은 황당무계한 골목대장 이석기와 그 일당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근거로 삼은 것이다.

국정원이 제작한 상황극이 우리를 34년 전으로 옮겨 놓았다. 우리들은 끔찍했던 그 시절 처럼 숨을 죽이고 권력을 두려워해야 할까. 미치지 않고서는 정치평론을 하지 못하고, 독서도 노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극으로 이석기 상황을 둘러싼 무대의 여백을 채워야 할까.    

국민들에겐 한 세대를 훌쩍 넘긴 이 상황이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사법부에는 통했다. 김용판 사건이나 이석기 사건을 심리한 법원은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권을 낳고 지키려는 국정원의 '국헌문란 죄'에 면죄부를 주는 서막으로 읽혀진다.

정권의 정통성 훼손을 막기 위해 사법부가 과감하게 오물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한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하고 모골이 송연해진다.

국민이 법관의 안위를 지켜주거나 신분 상승에 관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부도덕한 권력은 눈하나 깜빡하지 않고 생사여탈권을 휘두를 수 있다. 박근혜 정부는 이미 그런 위력을 노골적으로 과시했다. 국민들은 거기 퇴출된 소신의 빈자리를 채운 줄서기를 목도하며 다시 한 번 무너진다. 

박근혜 정부의 이같이 범상치 않은 국정철학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을까. 이 정부는 출범 직전에 헤겔의 변증법을 체제의 기조철학으로 전면에 내세웠다.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정부 등 산업화(정)와 민주화 시대(반)에 대한 '합'을 모색하는 시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정·반·합의 운동에 따라 역사가 최종적으로 도달할 목적지는 박근혜 체제가 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아버지가 시작한 일을 딸이 마무리하겠다는 적통의식을 담보한 방향성이다. 그러나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를 통합한 제3 세대의 창출이 물리적으로 가능할까.

절대가치 없는 통합은 '어불성설'

굳이 다른 입증이 필요없다. 박근혜 정부가 스스로 산업화세대의 한국적 민주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거기에는 현실을 빌미 삼아 절대가치를 배제하는 목적의식이 있다.
산업화시대를 이끈 박정희는 소득수준이 낮은 나라의 형편을 들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미명아래 노동3권을 제한했고, 남북 분단으로 전쟁위험이 상존한다는 이유를 들어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했다.

이런 한국적 민주주의 국정철학은 유신헌법의 모토가 되었고, 간선제를 통한 1인독재를 가능케 했으며, 정권에 비판적인 지식인·학생·노동자들을 영장없이 체포·구금할 수 있는 정치철학의 근간이었다.

박근혜 정부는 내란음모죄나 국가보안법 위반 따위로 여전히 국민을 핍박하며, 대기업들의 투자위축을 고려해 제한적 경제민주화를 추구하는 정권이다. '통합'이란 보편성의 토대 위에서만이 가능하고, 보편성은 절대가치를 중심에 세웠을 때 확보된다. 한국의 특수성을 내세워 배제하는 정치가 통합을 말하다니 이 얼마나 허황한 일인가.

최근 국정원 기획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조작도 이런 정권이 추상화의 미망에 빠진 철학에서 비롯한 것이다. '인권'이나 '분배의 가치'를 제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터무니 없게도 이 정부는 수정된 민주주의와 완전한 민주주의의 중간지대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어 보인다.

대통령만 아는 창조경제처럼 이 정권만 아는 창조정치는 제동장치가 없다. 필요에 따라 '3권분립'이라는 절대가치조차 제한하는 이런 정권의 끝은 어디이며 그 끝에서의 꼴은 어떤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