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특정한 권력을 살해한 권력이 장기 집권할 경우 특정한 권력에 씌워진 누명을 벗기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습되는 권력은 자신의 살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누대에 걸쳐 명분을 만들고 그것을 확대 재생산해 특정한 권력을 까마득한 지층 밑바닥에 묻어버리기를 중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이란 한사코 민의를 대표하기에 권력은 민심과 함께 생몰할 수 밖에 없다. 권력과 권력 사이의 잔혹사는 거기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특정한 권력이 어떤 지점에서 복권되고 그의 민의를 향한 족적이 복원된다 해도, 그 특정한 권력이 살아 있을 때 저지른 무자비한 만행 앞에서 우리가 소스라치게 놀라는 이유다.     

요즘 '정도전 재조명' 열풍이 제법 크게 일고 있다. 세간에 화제로 떠오른 공중파의 대하사극을 비롯해 최근 잇따라 출간된 책들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정도전의 험난한 노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냈다.

정도전은 고려말 권신들의 발호에 오랜 세월 유배와 떠돌이 생활을 전전하며 와신상담 끝에 새나라의 설계도를 완성했고, 그의 왕도정치 이상을 향도할 혁명의 칼 이성계를 만나 꿈을 이룬 뒤, 고려말 권력을 부패하게 하고 스스로 사치와 방탕에 빠져 백성들의 피를 빠는 불교를 완전히 근절하겠다는 일념을 불태운 인물이다.

긴긴 조선 5백년사를 거슬러 망원경으로나 볼 수 있었던 정도전이 갑자기 확대경 앞에 나타난 까닭은 무엇일까. 타락한 권력과 핍박받는 백성 사이에서 고뇌하던 지식인, 불의에 정면으로 맞서며 드높은 기상과 절개를 굽히지 않았던 선비, 그 정도전은 길에서 벗어난 오늘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을 명경지수처럼 선명하게 비춘다.

여러모로 개혁이 필요한 시기이며, 누구라도 자기혁명을 요구하는 지상명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오늘의 지형이다. 정도전 앞에도 타협하면 편한 길이 있었지만 고독한 길을 택했고 가시밭길 가장자리 망나니들의 칼춤 옆을 뚜벅뚜벅 걸어갔던 그는 마침내 도달한 목적지에서 그 서늘한 지표를 가리키고 있다.

역사에서 폐기되었던 대역죄인 정도전은 이렇게 부활하여 우리 앞에 섰다. 이 사회적 담론의 장은 정도전의 명제가 현실에서 여전히 유효하며 동시에 위험하다는 것을 집요하게 비추고 있다. 

혁명의 시작이 그렇듯이 그는 세상의 질서와 인간문화가 선(善)을 담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선악과 시비의 철저한 분별이 필생의 명제였던 이유다. 그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양성했고, 그들의 사회집단을 만들어 힘을 모았으며, 권력을 잡아 그런 기반을 공고히 했다. 

그와 그를 따르는 지식인 그리고 권력집단은 체제를 유지하는 기조철학을 이분법적 사고에서 구했으며, 권력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상대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권력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그 권력이 영속되어야만 이상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신념의 발로였다.

정도전이 제시한 권력의 이정표이자 사용설명서인 성리학은 그런 배타적 목적에 동원됐다. 성리학의 모토인 유학은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들어 앎에 이르고 그 앎을 실천하며 도덕과 인격과 학문의 성취를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거기에서 비롯하는 옳고 그름의 가치 기준과 보편타당한 상식, 중용 정신 같은 도저한 사상체계가 유학의 뼈대를 이룬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왕을 신격화 하고 백성을 노예화하는 성리학의 이기설(理氣說)에 접목되는 순간, 그러한 인류에 공헌하려는 유교의 모든 덕목은 지배와 피지배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무엇보다 그에 의해 유학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 규범으로 왜곡되어 결절된 지점은 후세들이 질곡을 벗어나는데 가장 큰 장애였다.  

정도전은 군벌과 권문세족의 땅에서 짐승과 다를바 없이 연명하는 백성들의 한을 먹고 자란 구원자였고, 역성혁명을 통해 사회를 구조 근본적으로 바꾸고자 했던 것은 그런 선의에 기반하지만, '왕조를 위한 배제'의 칼을 휘두르던 그는 결국 신의 권력을 인간에게 돌려주지 못했다.

그와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은 성실한 관료에 의해 합리적으로 권력이 집행되는 시스템을 갖추었지만, 종묘사직의 보전에 경도된 정도전의 독선 때문에 미완의 혁명에 그친 것이다.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집필한 불씨잡변은 조선의 문제와 오늘의 문제를 한꺼번에 함의하고 있다. 

성리학의 이념을 쪼그라뜨려 5백년 유일지배 수단으로 주저앉힌 그답게 불씨잡변의 논리는 정연의 극치를 보여준다. 거침없는 그의 필설은 윤회설과 인과응보설을 혹세무민의 거짓 주장으로 매도했고, 허무맹랑한 삿된 이론이 인륜을 없애고 사람을 짐승으로 만든다고 진노했다.

그 척불정책의 서슬에 불교는 산 속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로 인하여 불교 고유의 심원하며 자유로운 사유와, 모든 것을 통섭하는 원융 무애한 사상이 자취를 감췄다.

조선 51백년 봉건사회는 현재 진행형

영원불변의 실체적 자아가 없다는 '무아', 만사가 서로 의존하여 일어난다는 '연기', 모든 존재의 실상이 공(空)임을 밝히는 '중관', 일체 현상이 마음의 작용을 따른다는 '유식', 너와 나와 온 세상이 한마음이라는 '일심', 만물이 불성의 발현으로 장엄한 조화를 이룬다는 '화엄' 같은 해방의 사유가 조선 정신사에서 유폐된 것이다.

그 빈 자리에는, 성별과 신분을 차별해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근원적으로 말살하고 다른 사상과 이념을 이단으로 배척하는 패쇄성이 대체되었고, 끝없는 권력싸움과 유일체제의 폐습으로 우리들의 정신세계는 화석화됐다.

불교를 몽둥이로 쳐죽이는 심정으로 붓을 들었다는 정도전은 극단적인 진영논리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겼다.

이같은 이념전쟁의 악습은 이 땅에서 민족적 덕과 공동체정신을 퇴출했다. 성리학의 자폐적 질서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폐해를 안겨주었는가. 권력의 독선이란 무자비한 폭력성에 뿌리를 두며, 자기이익에 복종과 헌신을 강요한다.

지배이념으로서 성리학은 5백년 동안 조선에 정치와 경제의 독과점 뿌리를 뻗쳐내리게 했고, 크고 작은 권력에 의한 착취와 억압을 정당화했다. 정도전과 신진사대부들은 그 기득권세력이었고, 저항세력을 압살하는 주체들이었다.

2014년 현재 우리는 여전히 그들이 직조한 봉건체제 안에 있다. 부와 권세를 과점하고 그 기득권을 대물림하는 시스템은 난공불락의 촘촘한 지배와 피지배 구조 아래서 작동하고 있다. 성리학과 그 모체인 유학마저 변질시키고 자기만 존재하는 극우세력은 갑자기 암실에서 튀어나온 정도전을 어떻게 바라볼까.

그들이 아닌 우리들의 관점에서 진영간 숙명적인 대립의 수레바퀴 궤적 안에선 사실은 정도전도 피해자일까. 정도전은 혁명의 설계자였으나 권력의 일방통행로 위에서 결국 혁명에 쓰러질 운명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