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웅변은 은이고 침묵은 금이다’는 격언처럼 말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의 가치를 등가로 매길 수 있을까. 말은 기본적인 소통의 수단이지만 종종 오해를 낳는 법이니 침묵이 말보다 안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침묵이란 말을 중지한 상태를 가리킨다. 소통의 문을 닫아버리고 관계의 단절을 부르는 행위다.

따라서 웅변보다 침묵이 낫다는 격언은 ‘말을 줄이고 많이 들어라’는 자아실현과 소통의 방법을 가리키거나, 말보다 침묵이 효과적인 간혹의 경우를 가리키고 있다. 크게는 말을 조심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침묵의 용도는 거기까지다. ‘폐쇄’와 ‘경직’이 웅변처럼 사람의 감동을 이끌어낼 수는 없는 것이니까.

공동체 안에서의 침묵은 어디까지나 말을 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말할 때의 침묵은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가 된다. 침묵이 유연성을 지니는 때란 그렇게 대상과 교감하는 수단이 될 때다.
그런데 토론해야 할 책무를 지녔으면서 격론장에서 홀로 침묵하거나, 줄곧 침묵하다가 모두가 지친 토론 말미에 한마디를 툭 던지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은 이미 대부분의 토론자들이 기본적으로 제시했던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가 침묵 끝에 던진 한마디가 웅변을 대체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는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지 않고, 시끄러운 가운데 두드러져보이는 효과를 얻었고, 그가 가지고 있을만한 쾌도난마의 해법에 대한 기대를 품게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의 한마디가 그날 토론에서 도출된 결과로 인식되고, 그가 심사숙고하며 지혜로운 사람으로 오인되는 기막힌 상황이 연출되는 것은 거기에서 기인한다.

특히 그가 태생적으로 맹목적인 지지세력을 획득하고 있다면 그런 효과는 배가된다. 이런 경우 침묵은 자기 약점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국면을 끌고가는 강력한 동력이 된다.

특정 정치인이 이같은 ‘침묵의 자기관리’에 성공하면 대중들은 그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일찍이 침묵이 그렇게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든 눈과 귀가 쏠린 공공의 담론에서 침묵을 잘 사용하는 정치인도 간혹 자기이익 앞에서는 달변이 되며 광태를 보이기도 한다.

박근혜는 실로 가공할만한 ‘침묵 정치’의 창시자다. 하지만 우리는 새누리당 중진이었던 시절부터 그가 보여준 잠행과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또, 그의 아버지를 둘러싼 과거사 문제와 국가보안법폐지 또는 정수장학회를 둘러싼 사학법개정 문제에 대한 사생결단이, 자신이 침묵할 때 그것을 미화하고 효과를 극대화해 줄 진영의 결집과 힘을 기르는데 기여했다는 걸 좀 더 일찍 알지 못했다.

그 침묵정치는 한 나라의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되어서 더 노골화됐다. 윤창중 스캔들을 비롯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감찰과 사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분출, 기초연금과 4대 중증질환 지원공약 수정, 검찰개혁, 양극화 해소를 위한 경제민주화 약속 후퇴, 국조원의 간첩조작 사건 전반에서.

대통령은 현안이 복잡할 대로 복잡해지고 국면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선회하거나 불안과 불만이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 장기간 침묵했다. 그 끝에서 어떤 현안엔 ‘전쟁’을 선포해 혼돈 정국을 야기하거나 종북몰이 같은 악폐를 부추겼다. 말을 뺀 정치가 마이너스 정치로 진화한 것이다.

그리고 전면 침묵하는 현안들이 수두룩하다. 직무유기와 자질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침묵은 안전제일주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겠지만, 그의 무능을 그대로 드러내어 준다. 정치적 불신과 상처는 깊어져 막막한 상황에서 그는 하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한다.

경제활성화나 민생살리기 같은 말로 국민들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정치적 혼란이 초래한 지금의 경제난국에서는 자신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에 그야말로 차라리 침묵보다 못한 말이다. 더구나 대기업 규제완화를 거듭거듭 외치며 서민 주머니 털기식 증세를 주도하면서 내놓은 그런 말들은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그로 인해 이나라 정부는 권위와 보신의 침묵이 만연한다. 성격이 유약한 사람은 속마음이 충직하여도 말을 하지 못하고, 관계가 소원한 사람은 신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며, 마음속으로 개인의 득실을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이익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므로 감히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서로 침묵을 지키고 남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며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지러운 족적

이 지경이 된 것은 정치가 제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정치에 기대하기를 포기하고 감시의 눈을 돌려버린 결과다.

박대통령은 그런 정치혐오에 찌든 국민 정서의 수혜자이며 동시에 정치혐오증을 유발하는 대표적 정치인이다. 갈등을 조정하고 해소해야 할 책무를 지닌 국가 최고의 지도자가 침묵정치에 함몰되어 국민들의 정치 불신을 더 부추기고 있다.

그런 침묵 속에서 권부의 사법방해, 국가기관의 증거 조작, 검찰의 증거은닉과 허위진술 유도 같은 국기문란 범죄가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 그의 침묵에 이 나라는 어느 순간 어디에 곤두박질 칠 것인가.

국가기관이 무고한 특정인을 마음만 먹으면 처벌할 수 있다는 생각, 그런 목적을 아는 검찰의 동조가 버젓이 벌어지는 한 복판에는 침묵의 신호가 있다. 자신은 물론 동시에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침묵이다.

국정원은 현 정권의 정통성 문제를 야기한 직접 당사자이고, 그 수장은 정통성 논란을 상쇄하기 위해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국기문란을 감행했으며, 대통령은 침묵으로 화답했다. 이 정권의 초장에 몇 차례 철퇴를 맞았던 검찰은 이제는 알아서 기고 있는 모양세다. 박근혜 정부가 1년 여 동안 미치광이처럼 찍어 온 족적의 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