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지난 1일 인류에게 낭보 하나가 전달됐다. 미국의 한 대학 신경과학 연구팀이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뇌 신경세포의 신호를 다른 신경세포에 전달하는 부위(시냅스)를 빛의 파동으로 자극하면 기억을 되살리거나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이 쥐 실험을 통해 확인된 것이다.

알츠하이머 치매 환자는 신경세포에서 나타나는 독성 단백질 베타 아밀로이드로 인한 시냅스의 약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밝혀져 있는데, 이 시냅스에 고주파로 빛의 파동을 가하면 뇌 신경세포 간의 연결이 강화되면서 기억이 복원된다는 연구 결과가 영국의 과학전문지 네이처 최신호에 실렸다.

이 연구진은, 이와 반대로 자극 강도가 약한 저주파 빛을 짧은 시간 반복적으로 줄 경우 신경세포간의 결합이 느슨해지면서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밝혀냈다. 이 방식이 인체에 유효할 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 연구결과는 인류가 달을 정복했을 때의 흥분을 되살려 낸다. 동시에, 뒤이어 엄습할 허무와 결핍의 그림자를 예감케한다.

중력을 거슬러 지구를 벗어나 다른 별에 도달한다는 것은 초월이다. 과학문명이 넘어선 한계 앞에서 인류는 벅찬 환희를 겪으며 정신의 진화를 경험했다. 보다 오만해졌고, 보다 강고한 실증주의로 무장했다. 인류의 발이 달에 닿는 순간 신화의 세계는 사라지고, 인류는 스스로 신이 된 것이다.

기억의 정복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경세포 결합을 복원해 기억을 되살린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기억은 존재다. 뇌의 일부만 남아 의체에 의존하는 공각기동대의 쿠사나기 모로코처럼,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기억은 자아이며, 주체다.

그런 맥락에서 기억을 복원한다는 것은 죽었던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삶의 행복과 희열을 맛보기 위해 그토록 필생을 천착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것이다. 오감을 통해 저장되어있던 무자의적 기억들이 되살아난다면, 오감이 과거의 안내자가 된다면 심연에 가라앉아 있던 삶의 의미들이 과거에서 살아 돌아올 것이다.

기억을 복원할 수 있다면 기억을 보존할 수도 있다. 기억은 가치관을 구축한 무수한 정보들이며 사고와 반응의 질서다. 그러니 인류는 영생을 꿈꿀 수도 있겠다. 지난해 영국에서 소개된 로봇 바이오닉스맨 ‘렉스’는 팔·다리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을 비롯한 심장, 피부, 혈액, 안구, 췌장, 신장까지 갖추지 않았던가.

신체의 각 부분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교체하면 된다. 뇌마저도 기억만을 남기고 모두 인공화할 수 있다. 인간이 시간을 극복하는 순간이 머지 않았다. 유한성을 초월한 신세계가 열릴 것이다. 인간의 두뇌가 업로드된 컴퓨터를 다룬 영화 ‘트렌센던스’는 우리의 가까운 미래에 대한 보고서가 아닐까.

영화 안에서 컴퓨터가 중상을 입거나 질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데 사용하는 나노기술은 현실 속에서도 실현단계에 놓여있다. 암세포만 찾아 공격하여 치료하고 다친 뼈나 살도 빠르게 재생시키는 기술이다. 트렌센던스에 들어간 기억이 생명현상을 주재하고 지배하는 살풍경은 과연 유토피아일까.

이 영화가 남긴 끔찍한 충격은 영광의 유산인 테세우스의 배를 떠올리게 한다. 테세우스는 반인반우인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고 크레타의 지배로부터 아테네를 해방시킨 영웅이다. 아테네인들은 당시 테세우스가 귀환할 때 타고있던 배를 1800여년 뒤인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걸 때어내고 거기에 새 판자를 박아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조각 하나를 갈아치웠다고 해서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수백년이 지나면서 이 배를 이룬 낡은 판자조각들이 모두 새로운 것으로 교체된다면 그때도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을까.

미래 과학문명의 가장 큰 적은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나’의 실체는 무형의 정신인지, 전자기판과 마이크로프로세서인지, 뇌세포로 이루어진 사고회로인지에 대한 의문과 갈등을 시한폭탄으로 끌어안을 것이다. 게다가 기억은 퇴화한다. 촉각이나 후각, 미각, 시각, 청각의 기억들은 현실 속에서 같이 느낄 수 있어야 보존된다.

사이보그는 생체일 때의 오감의 기억을 현실에서 확인할 수 없다. 정보를 수용하는 느낌이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체였을 때의 기억은 점차 희박해지고 결국에는 사이보그가 습득한 정보로 대체될 것이다. 인류는 미래에 그런 경로를 타고 사라져 갈 것이다. 한낱 사이보그의 ‘전뇌’ 메커니즘 정도로 잔존하게 될 것이다.

기억은 망각 위에서 남는 것

더구나 기억이란 얼마나 불안정한가. 뇌를 포함한 인체는 끊임없는 세포의 죽음과 생성을 겪는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인체는 짧은 주기로 완전히 새로워지기를 반복한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가 아니다. 우리가 기억을 복원해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다면 그것은 무결점 상태의 기억일까.

밀란 쿤데라의 생각을 빌리면, 우리가 기억 속에 떠올리는 것은 생생한 실재가 아니라 오히려 그 부재의 모습이다.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환영이다. 한 조각의 삶의 체험은 오랜 시간의 망각 속에서 숙성되어 그로부터 무자의적인 기억을 통해 새롭게 일깨워져 변화된 상태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자의적인 기억은 망각을 전제로 한다. 

역설적이게도 망각이야 말로 실존이다. 인류는 무수한 망각을 딛고 새로워졌으며 필요한 기억 몇 개만 갖게 되었다. 망각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행복했던 순간이든 슬펐던 순간이든 지속될 수 없거나 지속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학이 인위적으로 기억을 복원하거나 지워서는 안되는 이유다. 현재를 과거와 연동시키지 못하는 치매 환자를 깨우는 것 이상의 개입은 무엇보다도 주체적인 삶을 무너뜨린다. 과학이 기억의 존재 방식을 침해하는 것은 관계를 묵살하고 존재를 타자화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과학은 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