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내가 석방한 사람들이 다시 나한테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런 일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소. 내가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내 생각에 충실하자는 것이오. 따라서 남들도 자기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오"

원로파인 폼페이우스와의 내전에서 승리한 민중파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적들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었을 뿐 아니라 재산도 건드리지 않고 거취 선택의 자유까지 허용하자 원로파의 일원이었던 키케로가 이를 칭송했는데, 카이사르는 위와 같은 신념을 밝혔다.

카이사르는 적들의 복권에 얼마나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었고, 결국 로마제국의 기틀을 만든 그는 자신이 사면한 부르투스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자기 의견 만큼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했던 그는 다양성의 공존이 직접적으로 자기를 위협하는데도 그것을 선택한 것이다.

하물며, 선출직 공직자인 자치단체장이 공직사회를 기득권세력과 소외세력으로 나누고, 기득권세력은 무조건 배제한다는 기준을 세운다면 공직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며, 이내 공무원들은 주체성을 상실한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런데 익산시에서는 이리고등학교 출신들이 익산시 공조직을 장악했고 그들이야 말로 기득권세력이라는 음해가 난무한다.

근거도 없다. 익산시청 내 이고 출신들의 총 수를 헤아려 구성 비율을 따져보면, 서기관이나 사무관 숫자가 다른 학교 출신보다 오히려 많지 않다. 요직을 이고 출신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잡념없이 들여다보면, 순리를 어겼다 여길만한 사례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8월 승진 인사에서 이고 출신들이 대거 배제될 것이라는 말들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비롯했다. 여기에, 전임시장의 동업자였고 친구였던 최측근이 이고출신이라는 전제가 따라붙어서 그런 타도의식을 부추기고 있다.

신임 시장이 자신에게 주어진 첫 인사에서 '승진 적령기의 사무관들을 배척하고 새파란 남고출신 사무관을 서기관으로 승진시킨 것도 그와 궤를 같이한다'는 솔깃한 분석이 공직사회의 중심을 관통한다. 게다가 최근 인사계장과 인사주무관을 남고 출신으로 교체한 것도 그런 분석에 설득력을 더한다.       

마치, 이제 남고 출신들의 세상이 오기라도 한 것 같다. 그러나 설령 신임 시장이 그런 불순한 조장에 넘어가더라도 혹은, 신임 시장의 생각이 이리고등학교 출신 숙청에 있더라도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궁극적으로는 명분이 없고, 역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투명한 세상 21세기다. 인사철마다 밀고 올라오는 이고 출신들을 어떻게 다 탈락시킬 것이며, 그로인한 공직사회 내부의 불만과 적의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더구나 전임체제로 운영되는 공무원노동조합이 엄존한다. 이 전 시장이 고뇌한 족적을 전혀 살피지 않은 몰지각한 무리들의 변설에 힘이 실려서는 안되는 이유다.

또한 신임 시장이 입성전에 들었던 무수한 정보들이 사실과 부합되는지 확인하지 않고서 배제의 인사를 단행한다면 초기에 동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더구나 첫 인사가 학연논리에 지배된다면 누가 온전한 체제로 인정하겠는가. 오히려 연공서열을 존중하고 직렬에 따른 소외를 바로잡는 인사를 통해 조직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 우선이다.

설령, 그동안 이고 출신들이 득세 했다 하더라도 '탕평'이 아닌 특정 고 출신 배제는 또다른 붕당 정신이다. 함부로 가다가 진퇴양난의 험로를 만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지금은 신임 시장에게 절영(絶纓)의 마음이 요구된다. '관 끈을 끊는다' 혹은 '넓은 도량'을 일컫는 절영은 초나라 장왕(莊王)에 의해 기원한 고사다. 

"관 끈이 끊어지지 않은 자는 마음껏 즐기지 않은 자이다"

그는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와 신하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베풀어 실컷 마시고 마음껏 즐기도록 했다. 저녁이 되어도 흥이 다하지 않자 장왕은 불을 밝히고 총애하는 허희(許姬)를 시켜 여러 대부들에게 술을 돌리게 했다.

그러던 중에 난데없는 광풍이 불어닥쳐 모든 촛불이 일시에 꺼져버렸다. 짧은 소란을 틈타 어떤 사람이 허희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허희는 깜짝 놀라 그 사람의 관끈을 잡아당겨 끊어 들고 장왕 앞으로 달려갔다.

무례한 자를 당장 찾아내 벌해야 한다는 허희의 말을 듣고 장왕은 다음과 같이 명했다. "오늘 이 연회에서 경들과 마음껏 즐기기로 약속을 했다. 경들은 모두 관끈을 끊고 실컷마시자. 관끈이 끊어지지 않은 자는 마음껏 즐기지 않은 자이다" 백관들이 모두 관끈을 끊은 후에 장왕은 촛불을 밝히라고 명했다.

연회가 끝난 뒤 궁으로 돌아온 허희가 군신간의 예를 거론하며 범인을 색출하지 않은 것을 탓하자, 장왕은 백관들이 자신의 명령에 의해 술에 취했고 취중의 광태는 인간의 본성이라며, "그를 찾아 벌하면 그대에게도 아름다울 것이 없고 신하들에게도 즐거움을 주지 못할 것이며 과인의 명한 뜻에도 어긋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그 후 초나라가 진(晉)나라와 전쟁을 하던 때였다. 장왕이 위급할 때마다 한 장군이 목숨을 내던지고 달려와 장왕을 구하곤 했다. 장왕이 의아하여 그 장군을 불렀다. 알고보니 그는 허희에게 관끈을 끊겼던 바로 그 장군이었다.

기원전 597년의 일이다. 군신간의 법도란 목숨을 내놔야 직간할 수 있는 엄혹한 시대였다. 더구나 군왕의 애첩을 접촉하고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장왕은 진나라, 제나라에 이어 세번째 강대국을 이룬 대왕다운 면모를 지녔던 것이다.

이렇게 승리한자나 강한자의 도량은 공존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대통합을 꾀할 뿐, 이편 저편을 가르며 저편에 대한 적대감을 감추지 못하는데 있지 않다. 그런 좁은 시야로 시정을 재단하면 해봐야 되는 일이 없고 시민들의 고통만 심화된다. 

승장은 사로잡은 적을 예우하며 그 투지와 용맹에 존경을 표한다. 그것은 상대를 감화시켜 동지로 만드는 방법이며 싸우지 않고도 적을 이기는 상책이다. 제갈공명이 금만의 왕 맹획을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 주어 결국은 항복하고 촉에 귀순케한 칠종지금(七從七擒)의 고사가 그것을 웅변한다.

내편이 아니면 모조리 죽인 조선의 붕당 정치는 얼마나 허망했는가. 칼자루를 쥔 쪽이 휘두른 피의 광풍은 어느 결에 되돌아와 권력무상을 일깨웠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조선의 사림들은 상대를 쳐서 제거하면 권력이 영원할 줄만 알았다.

단조롭고도 터무니없는 칼부림의 연속선상에서 우리는 또, 수많은 나라의 재목들이 어이없게 스러져간 붕당의 질곡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붕당이란 본래 분열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내부에서 끊임없는 분열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역사는 입증한다. 붕당이 성하면 정의는 존재하기 어렵다.

우리는 한 쪽을 택하고 다른 쪽을 버리는 숙종의 환국(換局)정치를 통해 일당 독재의 폐해를 지켜봤으며, 정치세력이 일진일퇴를 되풀이하는 동안 참혹한 살육이 벌어지고 정치는 실종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일찍이 인조반정(1623)으로 북인을 몰아내고 서인과 남인의 연합정권이 수립되었으나, 현종과 숙종으로 이어지는 1-2차 예송논쟁의 여파를 이용해 숙종은 서인의 수장이자 당대의 실력자인 송시열을 내쳤다. 서인들이 밀려난 자리에 이하진 등 남인들이 대거 요직을 장악했다.

붕당은 일진일퇴 살육이 거듭되는 참화를 부르고

그러나 남인은 곧 허적·권대운의 탁남(濁南)과 허목·윤휴 등의 청남(淸南)으로 분열됐고, 숙종 6년에 영의정 허적이 사형되는 등 수 많은 남인들이 처벌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을 맞이한다. 곧바로 서인들로 요직이 교체되었다. 하지만 숙종이 궁녀 출신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왕위 후계자로 삼자,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격분한 숙종은 서인들을 내쫓고 남인들을 다시 불러들였다. 인현왕후 민비는 폐위되었고 송시열에게는 사약이 내려졌다. 숙종 15년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이었다.  

5년 후, 서인 쪽에서 인현왕후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었다. 남인들은 이를 빌미로 서인들을 확실하게 제압하려고 했는데 상황은 거꾸로 전개되었다. 새롭게 숙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숙원 최씨에 대한 독살설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숙종은 장희빈 등에 염증을 느끼던 터에 인현왕후를 복위시켰다. 서인들도 함께 되돌아왔고, 남인은 정치적으로 거의 몰락했다. 숙종 20년에 일어난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다.

그동안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어 대결구도가 서·남 대결에서 노·소 대결로 바뀌었다. 소론의 일부는 세자 보호를 위해서 장희빈이 자결한 이후 홀로남은 세자를 위해할 구실이 생기지 않도록 장씨 일가도 보호하려고 했다. 세자를 둘러싼 소론과 노론의 대립이 차츰 심각해져 갔다.

숙종은 말년에 와서 갑자기 세자의 대리청정을 실시했다. 일련의 조치가 노론과의 묵계 속에 세자의 흠을 잡아 왕위계승자를 바꾸려는 저의가 있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숙종이 죽자 뒤를 이어 세자가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경종이었다. 그러나 경종은 재위 4년 만에 죽고, 왕위는 배다른 동생인 영조에게 넘어갔다.

숙종은 당쟁을 이용해 강력한 왕권을 누렸지만, 노론에 배신 당했다. 노론은 경종을 강압하여 왕위가 영조에게 넘어가게 분투한 것이다. 소론 내 강경파는 경종 독살설을 제기하며 노론이 옹립한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신하들의 택군(擇君) 속에 국왕의 권위는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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