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요사이 군도와 명량, 두 편의 영화가 한 여름 폭염보다 더 뜨겁게 우리들 가슴 한 켠의 응어리를 녹이고 있다. 개봉 첫 날 입장 관객 수에서 최고기록을 달성 하더니 10일만에 천만 관객에 육박한 흥행성적은 우리가 얼마나 거기에 기대며 위안을 받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군도는 조선의 민란시대를 다뤘다. 약육강식의 생존법칙 아래 착취가 만연한 세상에는 탐관오리들이 기승을 부리고 그들을 등에 업은 상인은 민초들의 고혈을 짜 부를 쌓으며 폭주한다. 상투적인 스토리다. 그러나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 역시 그 뻔한 1%가 과점하는 억압에 온전히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선 정경유착과 불공정한 시장을 상대로 활극을 벌이려고 하면 몸부터 천근 만근 무거워진다. 경거망동하다가 그나마 잡고 매달려 있는 밥줄마저 끊길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항하다가 철저하게 짓밟히는 이웃들의 최후를 수 없이 지켜보며 교훈을 얻었다.

'희망을 갖지마라. 희망은 나를 괴롭히며, 결국 나를 집어삼킬 괴물이다' 그렇다. 우리는 희망 없는 공간에서, 도저히 깰 수 없어 보이는 기득권을 상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기를 멈추지 않는 스크린 속의 주인공 도치와 의적떼에 몰입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픽션의 세계에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바로잡아 백성의 힘이 되려고 했던 의적 떼의 본거지인 군도(群盜)는 이상향을 꿈꾸지만, 기득권에 저항했다는 이유 하나로 범죄자들의 산채에 불과하다. 의적들이 수많은 관아를 털어 백성들에게 편취한 양곡을 나눠주고 탐관오리를 척살하지만 또 다른 탐관오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극악한 수법으로 양민들을 수탈하여 삼남지방 최고의 부호가 된 백성의 적 조윤 역시 결국 도치의 손에 죽지만, 그 역시 부조리한 구조 내부의 제로섬 법칙으로 윤전하는 악당에 불과하다. 군도는 살기등등한 정글의 법칙 그 민낯을 바짝 다가서서 들여다보는 영화다.

이런 맥락에서는 민란은 그저 도태될 자들이 일으키는 것이니, 그런 집단이 의적이라는 외피를 입더라도 모든 양민을 의적화할 수 없고, 백성들의 희망이 될 수 없다. 그저 끊임없이 권력에 쫓기며 토포될 운명인 것이다. 조선의 곡절이 고스란히 담긴 구조와 질서가 엄존하는 공간에 관객들이 있기에 스크린은 그렇게 흡인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 군도에 열광하는 것은 그렇게 실상에 기초한 픽션이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조윤이 부리는 장검과 몸놀림이 우아한 칼춤으로 승화되고 도치가 휘두르는 쌍도가 허공에서 불꽃튀는 음조를 변주하는 매 지점에 우리가 깊이 빠져드는 것은, 그리하여 우리와 스크린 내부의 참담한 실정을 순간 초탈케 하는 것은 이 영화가 지닌 농담이자 힘일 것이다.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이라는 영화 군도의 명제는 그토록 가볍게 우리 내부에 스며든다. 백성들이 뭉친 의적은 희망이 될 수 없지만, 백성들이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뭉친다면 지금의 스크린 안팎 어디엔가 다른 길이 있다는 믿음이 굳건해 보이게 하는 것이다.

영화 명량은 그 '뭉침'이 한 개인의 결연한 의지와 희생에서 비롯된다는 역설을 담고 있다. 내부에 독버섯처럼 퍼져버린 두려움을 한 척의 배에 싣고 스스로 사지에 들어간 이순신의 얘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영웅 이순신은 스크린 안에서 멋을 부리지 않았다. 모든 배가 안전할 수 없는 회오리 바다에서 왜적 함선을 맞아 치열하고 처절한 해상전투를 지휘하는 사면초가의 장수일 뿐이었다.

사면을 포위한 왜적들과 거듭 백병전을 벌이며 사투를 벌이는 이순신에게 왜선 몇 척을 격파하는 것보다 절실했던 것은 '할 수 있다'는 용기였다. 그가  간악한 모함에 투옥된 채 핍박을 받고 있는 사이 칠천량에서 거북선을 모두 잃고 패퇴한 조선 수군들의 두려움이 극복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탈영이 잇따르고 퇴각을 주장하는 부장들, 결사항전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이순신의 침소를 급습한 시해 시도 같은 비정상은 전장에서 공포가 야기한 역병보다 치명적인 위험요소였다. 더구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을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우리가 외면한 자리에서 수많은 이상향과 영웅들이 스러져 갔다

이순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지에서 살아남는 길뿐이었다. 그것은 아군의 용기를 회복하는 것이자 앞서 한산도에서 대패했던 왜군들의 공포를 일깨우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순신이 배 한 척으로 왜적의 배 수십척을 궤멸하자, 후미에 멀찍이서 떨어져 있던 부장들이 지휘하는 배 11척은 왜군의 배 300여척과 전면전을 벌여 승리를 거둔다. 그 핵심 요소는 죽고자 하였기에 살아남은 이순신의 용기였다.

이 같은 이순신의 정신은 궁극적으로 도치의 정신과 궤를 같이 한다. 세상을, 혹은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행동은 무모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이 각각 다른 어법으로 영화 군도와 명량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다. 운명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선 영웅들의 이야기를 군도는 화려하게 명량은 우직하게 풀어놓았다.

회오리 바다에 왜선들이 빠져들어 서로 부딪히다 침몰한 상황은 이순신이 미리 예측한 결과였지만, 이순신은 이를 두고 '천행'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천행은 백성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사생결단의 전쟁터에서 찢기고 죽어가는 병사들의 고통을 백성들이 알아주지 않지만,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이순신의 신념에 스크린 안팎에서 백성(하늘)들의 화답한다.

착취와 침략은 가장 위험한 폭력이다. 폭력에 물러서지 않고 폭력으로 맞서는 이상향과 영웅은 지극한 정성으로 스크린 밖의 우리들에게 외친다. "모든 일이 남의 일인 적은 없다. 우리가 외면한 자리에서 수많은 이상향과 영웅들이 스러져 갔다"

이 한여름 폭죽같은 응전의 향연에 우리는 환희를 얻거니와, 그것은 가슴이 먹먹할 때 더욱 강렬하다. 만약에 세월호 안에 이순신이 타고 있었다면, 해봐야 안되는 우리들 일상에 '분배의 정의'를 좇는 도치의 의적 떼가 있다면 우리들은 어떤 길을 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