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는 정신이 또렷해진다. 굶주려 쇠잔한 몸이 지워진 길 위에 꼿꼿하게 설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러나 그런 불굴의 의지도 오랫동안 한파에 노출되면 쇠잔해 질 수밖에 없다. 그러한 시절에 아무런 조건도 없이 나를 부축해 함께 앞으로 나아가던 벗들이 있었다. 그 중 한 벗이 최근 나를 찾아왔다.

그는 선거판을 전전하던 무명의 박경철을 오랫동안 도왔던 사람이다. 박경철이 선거를 업으로 삼는 '꾼'으로 낙인 된 뒤에도 그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상당기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세상에 이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며, 그런 사람은 곤궁하고 외롭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지난 10년의 어간에 나와 박경철의 옆을 지켰던 것은, 어쩌면 자신이 외롭기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와 같이 호흡하면서 스스로 삶의 지평을 넓히는 방편이 아니었을까. 이 세상 한복판, 또는 한구석에서 지독하게 외로운 그가 옳은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 한다.

우리는 그때 서로가 매 순간 바른 지표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박경철은 때묻지 않은 사람이었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우리는 그가 지닌 불굴의 의지를 높이 샀다. 그가 선거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반드시 이타심의 발로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난 6.4지방선거에서 박경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충격적이었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들 때문이었다. 텔레비전 토론회에서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사안을 놓고 박경철은 특별히 고도의 연기력을 보여줬다. 교활의 극치를 달리는 그 언동을 지켜본 이후 나는 한동안 공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던 사람이 맞나?  

더욱 기막힌 것은 그가 당선된 직후 당선 소감을 들으러 간 소통신문 기자들에게, 토론회 때 보다 더한 거짓말을 하며 입증할 증거자료를 한 아름 가지고 있다고 한 술 더 뜬 행태였다. 내가 아는 한 그가 말하는 증거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나는 문득 익산시에 닥쳐 올 불행들을 직감했다. 동시에 나는 곧 극지점에 떨어져 한파와 싸워야 할 것이라는 걸 예감했다.

그것은 매우 빠르게 현실로 다가왔다. 박경철은 취임 이후 짧은 기간에 지방자치 사상 초유의 역사들을 숨 가쁘게 기록했다. 묻지 않고 듣지 않고 헤아리지 않고 갈등과 반목을 야기하는 일들을 밀어붙였다. 그런 어수선한 판에 '화해와 협력'이라는 주제를 들고 벗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모두가 불통에 질리고 새로운 권력의 전횡에 위축 되어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마당인데, 그런 혼란을 불러온 닫힌 박경철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그는 아니라고 맞섰다. 박경철은 들을 줄 알고 옳다고 생각하면 실천할 줄 아는 열린 사람이라고 했다. 벗은 내게 자신을 믿으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익산시장 박경철은 과거에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박경철의 완벽한 연기에 속았었는지도 모른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경철 시장은 약이되기에 쓴 말하는 공무원을 '이한수 시장에게 혜택받은 자'로 규정하며 배척하고, 부적절한 지시에 진땀 흘리며 조언하는 공무원을 "나와 함께 일하기 싫은 사람"으로 분류하며 강압하고 있다. 이것이 모든 파열음과 실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벗은 여전히 손사래를 쳤다. 나는 답답했다. 박경철은 스스로 시민이 뽑아준 익산시의 대표이기 때문에 시의회는 물론 너나 할 것 없이 알아서 자신을 도와야 한다는 태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자신이 초법적인 권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고 부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위험한 시장, 불행한 시민

사건들을 일일이 나열하면서 향후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릴 것이라고 해도, 오직 정치적인 이해득실 때문에 지역사회를 혼란에 빠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도, 익산시를 역주행시킬 실로 위험한 사람이라고 말해도, 벗은 끝내 도리질 쳤다. 이런 믿음이 어디에서 올까. 박경철의 정치여정 중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다.

내가 모르는 것을, 혹은 박경철을 지켜보며 탄식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르는 것을 그는 알고 있을까. 벗은 자신이 박경철을 만나보겠다고 했다. 그때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기회를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내가 엉거주춤한 시간을 한달여 동안 보내는 사이 벗은 박경철을 두차례 만났다. 그리고 또 한달이 지나는 동안 박경철의 역주행은 거칠고 훨씬 더 위험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공무원들이 "불가한 일이다"며 간언해도 묵살하고 찍어누르며 기어코 일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법리상 불합리하다는 검토 결과를 보고하면 불복종으로 간주하여 감사담당관실에 감사를 명령했다. 감사담당관실은 감사 지시가 정당한 사유를 지니고 있는지를 검토하지 않고 즉각 감사에 착수해 영문도 모른 채 피감 대상이 된 공무원을 잡아 흔들거나 징계처분했다.

실로 조폭 두목같은 시장에 영혼없는 행동대 같은 감사실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자신을 그렇게 믿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박경철 시장은 알고 있을까. 모르고 있다면 박 시장 자신의 불행이며, 알고서도 벗의 충직한 바람을 저버렸다면 익산시민들의 불행이다.

나라면 모든 사람을 잃어도 그 벗 한 사람만은 잃지 않겠다. 장차 박경철의 옆에 누가 남아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