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중국 관료들의 지침서로 널리 읽혀 온 신음어(呻吟語, 여곤 著)에는 "사리 판단을 잘 하는 사람의 업무 태도를 보면, 그것이 바른 해법인 줄 알면서도 바로 실행하지 않는다. 다시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하고 모두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 방법이 도리에도 맞고 또 여러 사람의 의견과도 맞을 때 즉시 착수한다"고 큰 일을 하는 사람의 조건을 제시했다. 

또, "도리에는 맞지만 여러 사람의 의견이나 감정에 맞지 않을 때는 좀 더 면밀한 대책을 강구한 다음,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문제 해결을 꾀한다. 그렇게 하면 도리상의 가치도 떨어지지 않고 일반대중들도 납득하게 된다. 이것이 사리를 바르게 세우는 수단이다"고 했다.

여곤의 이런 지침은 악습에 대처한 공자의 유연성에서 포착됐다. 당시에는 '엽교'라는 사냥시합이 있었는데, 사냥해서 얻은 사냥감으로 승패를 결정하고 승리한 쪽이 패한 쪽의 포획물까지 빼앗아 제사를 지냈다. 공자는 이 풍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전래되어 온 그 풍습을 갑자기 뜯어고치지 않았다.

다만, 제사에 쓰는 그릇의 수를 제한하여 남은 포획물은 제사에 사용하지 않도록 했다. 이렇게 패자에게 과도한 희생을 강요하는 악습을 전면적으로 폐지하지 않고 패자를 위로하는 정도로 수정한 것은, 악습이 지닌 순기능도 역기능에 못지않게 컸기 때문이다. 우선, 사냥시합과 제사는 공동체의 결속을 공고화하는 풍습이었다.

함께 즐기고, 협력하고, 같은 하늘을 섬기고, 함께 나누는 미덕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사냥시합은 건강한 신체와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이었다. 특히, 오래된 관행을 무리하게 막으면 혼란과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철폐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수긍하는 수준의 수정이 모두에게 이롭다고 판단한 것이다.

대중의 뜻을 수용하되 한 쪽으로는 도리에 맞도록 하는 지침은 그렇게 신중한 눈이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발견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잠시만 호흡을 늦추면 잘 보인다.

박경철 시장이 각종 공약사업들을 밀어붙이다 실패한 것은 다른 의견들을 수렴하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자신의 생각에 오류가 있다는 여론에도 대책을 강구하지 않은 채 관철시키려고만 하고 있다. 더구나 의회는 대의기관인데 사업비 승인 안건을 부결시킨 뜻을 살피지 않고, 의회가 사사건건 시정의 발목을 잡는다고 비난하며, 그대로 다가오는 회기에 재상정하라고 지시했다는 말이 들린다.

이런 행태는 도리에도 맞지 않다.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에 부합하지 않고 일반적인 정서와도 충돌하는 사안을, 철회하거나 고치려 하지 않으면서 그걸 인정하라고 하는 것은 굴복을 강요하는 것이다. 자신만 옳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릇되었다고 생각하는 독선의 발로다. 의회를 수직적 관계의 하위기관으로 바라보는 착각에서 비롯한다.

결국 박 시장 자신만 그릇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옳을 경우에는 그 피해를 시민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박 시장은 지난달 26일 '고도익산 정립·박물관 기능' 세미나 이후 이어진 모든 행사의 식순에서 익산시 의회 의장과 양 국회의원의 축사를 없애도록 지시했다. 이로인해 익산시로부터 축사를 요청받고 행사에 참석했던 정치인들은 모멸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같은 날 잇따라 개최된 평생학습축제와 익산예술제에서는 축사가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일방적이었다. 축사를 준비해 갔던 시민의 대표들은 그저 허탈하게 자리를 지켜야 했다.

관계 공무원들은 새파랗게 질렸다. 혹자는 하라는 대로 하지만 잔치에 초청해 놓고 정작 밥상 앞에 앉지도 못하게 하는 것과 같은 자신의 무례에 어찌할 바를 몰랐고, 혹자는 박 시장에게 도리가 아니라는 점을 건의했으나 박 시장의 서슬에 눌렸다. 그런 박 시장의 위세는 등등했다.

배산체육공원의 평생학습축제에서는 익산시의회 의장과 현역 국회의원의 축사가 제외됐고, 솜리문화예술회관의 익산예술제에서 역시 똑같은 행태에 반발한 조규대 의장이 만류를 뿌리치고 축사를 감행한 뒤 연단을 내려오자 박 시장이 주변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저것들 버릇을 고쳐놓겠다"며 노발대발했다.

조규대 의장은 다음 날인 27일 익산 프로줌마 페스티벌 개막식에서도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다.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연단 위에 있는 박 시장을 거칠게 비난한 뒤 자리를 떠났다. 박 시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는 지난달 29일 오전 홍보담당관에게 성명서를 대독 시켰다.

시장에 대한 의장의 폭언은 시장과 참석자들의 인격을 모독하고 익산시민 전체를 무시하는 오만불손한 행위, 또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규정하며, 의장의 공개 사과와 의장직 사퇴를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성명서에는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흥분 상태가 적나라하게 담겨있었다. 한 개인이나 시민단체가 공공기관을 향해 쏟아놓는 성토와 다르지 않았다.

박 시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다음 날인 30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의회 보이콧이라는 직권남용을 자행했다. 행정사무감사를 갈무리하는 제179회 익산시의회 1차정례회 3차 본회의장에 자신이 불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든 공무원들에게 불참을 지시해 대의기관의 업무를 방해한 것이다.

거듭된 직권남용, 호도하는 박경철

이날 오전 10시에 시정질문과 5분발언을 준비했던 의회는 본회의를 한 시간 뒤로 연기하면서 시장과 공무원들의 참석을 요구했으나 끝내 불참해 본회의는 더이상 회의를 진행하지 못한 채 산회됐다. 박 시장은 공무원들의 본회의 불참 이유로 조규대 의장이 직을 사퇴하지 않는 것을 들고 있다. 집행부는 의장이 사퇴하지 않는 한 태도를 바꾸지 않겠다는 공문을 의회에 전달했다.

의회는 산회하면서, 독단과 독선, 일방통행으로 일관한 박경철 시장 취임 3개월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채택했다. 사적인 감정에 공무원을 이용하며 의회민주주의와 지방자치에 역행하는 박 시장의 반성과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그러자 익산시는, 같은 날 모든 행사에서 주최 및 후원 기관단체장과 시장을 제외한 정치인들의 축사 관행 철폐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권위적이고 관료적인 행사 의전의 문제점 개선이 그 이유다. 그 다음 날에는 의회의 성명을 겨냥해 시장의 욕설사태에 대한 본질을 흐리고 여론을 호도하는 것이라는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성명서에는 또, 그동안 의회는 시비걸기와 발목잡기식 의정으로 광역상수도 전환, 함열 청사 이전 문제 등 민선 6기 핵심 공약사업 추진에 사사건건 반대하고 제동을 걸어왔다고 적시했다.

왜 이런 사태가 숨 돌릴 틈도 없이 벌어졌을까. 그 발화점은 어디였을까. 평생학습축제 직전에 원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열렸던 '고도익산 정립·박물관 기능' 세미나를 눈여겨봐야 할 것 같다.

이날 축사에 나선 이춘석 의원은, 익산국립박물관 건립의 타당성 연구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용역팀에게 문체부가 부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온 점을 폭로하고, "용역결과가 문체부의 의도대로 익산국립박물관 건립 불가 쪽으로 도출된다면 그 원인과 문제점을 찾아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했다.

그러자 앞선 박 시장의 축사에선 건조하게 박수를 쳤던 시민들이 이춘석 의원에게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그 이후 정치인 축사 배제 사태가 돌출했고 이내 제동력을 잃고 급전직하한 것이다.
여기서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각종 행사에 익산시가 보조금을 지급한다고 해서 주최 측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축사를 빼라 너라 하는 권한이 있다는 발상은 어디서 기인한 것인가. 정책을 수정하듯 행사 주체에 지침을 내리는 익산시의 작태는 무엇을 근거하는가.

'직권남용'이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박경철은 자신이 감정적으로 저지른 과오를 호도하기 위해 전선을 점점 더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익산시의 수장이기에 시민들은 피할 곳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