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지방자치의 날 오후, 춘포역 주변의 빈 들녘은 무심했다.

저만치 만경강 뚝에서는 만개한 코스모스와 갈대숲 사이를 고운 빛으로 물들인 햇살인데, 갈라진 들녘을 떠나지 못한 벼 밑동과 그 주변에는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기억처럼 희멀건 햇살이 담겨있었다.

이 마른 땅에선 바람조차 갈라져 서너 갈래 회오리 바람이 된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떠돌다가 제 몸을 찾아 다시 붙어 사라지곤 하면서 혼절과 평온의 서사를 빈 들녘에 풀어 놓는다.

한 해 동안 길어 올렸던 생명을 잘린 밑동을 어루만지듯이 바람의 푸닥거리는 그칠 듯 하다가 자꾸만 이어진다.

오래 전, 수탈의 배가 닿았었고 오늘도 다 내어준 들녘은 자유로운 바람길을 지운 걸까. 속박을 받아들이고 살점을 내어주던 무기력의 저주가 여전히 풀리지 않은 걸까. 묵은 주술의 벽에 부딪혀 역류하고 부서지는 바람에서는 짙은 물 냄새가 났다.

결국 물처럼 벽을 넘어갈 바람은 오산벌을 지나왔으리라. 거슬러 올라가면 함라와 웅포를 거쳐 금강에 닿으리라. 금강에 머물렀던 그 바람은 어쩌면 여산을 지나 금마와 왕궁을 거치는 길을 따라 이곳 춘포뜰에 왔을지도 모른다.

바람은 그래서 젖어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바람은 목마른 땅을 적시지는 못한다.

때를 놓쳤다.

비를 몰고와 만물을 움트게해야 할 때나 이롭게 해야 할 때에도 홀로 배타적이며 자유로운 낭인의 세월을 보냈다.

이제 곧 만물을 움츠러들게 할 삭풍의 서슬을 피해 멀리떠나야 한다.

그럴 힘을 마지막까지 비축해야 하니까.

하늘이 준 은혜를 누릴 뿐, 보답할 줄 모르는 바람의 최후를 나는 익산의 남쪽 끝에서 배웅했다.

저 바람은 지나온 길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려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한 점의 미련도 남김없이 함께 떠나보냈다.

배타적이며 자유로운 낭인의 바람은 홀연히 빠져나가고

우리는 그 칼에 입은 상처가 아물면 그 악몽도 잊겠지

왜 하필 오늘이 지방자치의 날일까. 대법원은 2015년 10월 29일 오후, 2014년 6월 4일의 익산시장 선거는 '무효'임을 최종 확인했다.

익산시민들의 선택이 기망당한 결과이므로, 간상 모리배가 사취한 익산시장 직을 삭탈하는 판결이다.

지방자치의 날에 우리는 내동댕이쳐져 사지가 탈골된 지방자치를 목도하게 된 것이다.

실로 허망한 일이다.

지난 16개월 동안 지역공동체를 전방위적으로 들쑤셨던 존재가 저 바람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익산시민들이 입은 수많은 상처들은 삭풍이 에일테지만, 그것은 저마다 감당해야 할 책임일 뿐, 배상을 받을 길은 없다.

익산시장을 행세하며 지역공동체에 중상을 입힌 모리배는 떠나면 그만이다.

그는 16개월동안 익산시장이었던 적이 없었고, 당선된 바도 없는 상태로 돌아간다.

하지만 익산시민들은 참담한 심경에서 오랫동안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6.4지방선거에서 속았다는 낭패감도 소용돌이의 진원이거니와, 지난 16개월동안 그가 몸소 보여준 온갖 난행들은 27년 동안 익산시민들을 속여 왔다는 것을 방증하고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만 믿고서 기성 정치인들에게 결여된 것을 그가 가지고 있으리라 기대했던 지난 세월들에 대한 상실감에 몸서리를 친다.

참을 줄 모르고, 가려서 행할 줄 모르고, 들을 줄 모르고, 상대를 이해할 줄 모르고 존중하지 않으며, 힘을 모을 줄 모르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그가 백일하에 드러난 16개월이었다.

이렇게까지 형편없는 모리배를 무려 27년 동안이나 알아채지 못했다니, 익산시민들의 열패감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툭 하면 치고받고, 익산시장으로서 정치인으로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금도를 밥먹듯이 저버리고, 자신의 뜻에 반하면 바른 말 옳은 말을 하는 부하들에게 죄를 묻고 조언이나 충언을 하는 주변을 적대하고 무조건 자신을 가로막는 장애로 간주하며, 안에서나 밖에서나 편가르기를 일삼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그는 최근까지도 익산시민들을 패닉상태에 빠뜨렸다.

그런 모리배가 27년 동안 자기를 정치인이라고 일컬었다니, 기성 정치인들보다 더 잘할 수 있다고 말하다니, 거짓말로 하늘조차 속일 수 있는 양 하는 그가 청렴을 입에 올렸다니, 말문이 막히고 진저리가 나는 것이다.

모리배는 불과 며칠 동안 유권자들을 감쪽같이 속였으며

반평생 익산시민들을 속여 온 사실을 증명한 지난 16개월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조만간 닥칠 망각이다.

지난 선거의 원천무효화에 덩달아 수치심을 지우고, 새로운 정치적 설계에 함몰되어 통각을 마비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까. 상처의 고통에서는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내가 갖게 된 이 큰 흉터를 보고싶어 하지 않고, 그리하여 상처의 기억조차 잊게 될 것을 우려한다.

나는 지난 6.4지방선거가 끝난 직후, 그제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한탄하는 목소리들을 접했다.

그들은 투표가 끝난 뒤에서야 선거공보물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채 한 표를 행사한 스스로의 가볍고도 어리석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선거공보물에는 당선자의 사기성과 무책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유권자들은 또, 방송토론회 등에서 당선자가 했던 말들을 그대로 믿고 투표에 임했던 점을 통탄했다.

그가 상대 후보인 전임시장이 익산시를 부채공화국으로 만들고, 소각장 건설과 관련하여 비리를 저지른 것으로 오인토록 허위사실을 공표했다는 언론의 보도와 검찰의 수사착수 소식을 접하고서였다.

하지만, 당선자는 백척간두에 선 처지에서도 지방자치 역사상 전례없는 말짓을 서슴지 않았다.

원했든 원치않았든 자신이 중심에 선 물의에 대해 일말의 책임의식도 없어 보였다. 불안한 나날 속에서 복장터지는 건 유권자들이었지만 선택의 책임을 달게 감수해야 했다.

나는 또 어처구니 없는 고백들도 들었다.

"불쌍해서 찍어줬다", "무소속이니까 찍었다", "비용보전이라도 받으라고 찍어줬다" 등이다.

속거나 무책임하거나 동정으로 한 표를 던지다니, 그것이 익산이 서있는 지방자치의 현주소다.

그렇게 모리배에게 익산시 전체의 운명을 맡기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또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설마 정말 당선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자기가 뽑아 놓고 의외의 결과에 어처구니없어 하는 꼴이었다.

그렇다. 비극이다.

유권자들이 지난 15개월의 악몽을 자초한 것이다.

모리배는 아무런 댓가도 치르지 않고 저 가을바람처럼 사라지면 그만이지만, 그가 저지른 잘못의 모든 피해를 유권자들이 군말없이 고스란히 감수해야 하는 이유다.

모리배는 임기중에 지은 오산의 큰 집에서 남은 여생을 보낼 것이다.

이 가을 그 오산벌을 지나 익산의 남쪽 끝을 빠져나가는 바람은 여전히 자유롭고 배타적이다.

그러나 그 바람이 누릴 영역은 우물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독선과 독단 그리고 교만의 숙명이다.

우물 밑바닥의 물에 자기를 의탁하기에 우물 밖을 볼 수 없는 고립무원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이 상처가 우리의 눈을 더 맑고 깊게 하는 자양이 되기를, 내년 사월에 불어 올 생명의 바람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 볼 수 있게 되기를, 봄바람이 익산으로 들어 올 초입인 남쪽 끝 춘포의 빈 들판에서 가슴저리게 각성한다.

참혹한 상처투성이 익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