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공인배

몇 달 전 새누리당의 유승민 파동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당의 원내대표로서 국회법 파동의 중심에 섰던 유승민은 대통령의 "배신자"라는 한마디에 결국 물러났다.

그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정치생명을 걸다가 반민주적인 힘에 밀렸다.

그가 입법부의 일원으로서 행정부 수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에 따라 의정활동을 한 것이나, 자진사퇴 압력에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버틴 것이나, 모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제1조 제1항을 수호하는 직분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새누리당 의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유승민 원내대표직을 의총을 열어 박탈했다. '윗분'의 뜻을 받든 것이다.

새누리당 의총은 민주주의보다 원활한 국정운영에 더 가치를 부여한 꼴이다.

여당 국회의원들이 삼권분립 원칙을 부정하고 입법부가 스스로 행정부에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 참사였다.

절차를 바로 세워 행정부의 전횡을 막으려 한 유승민의 입법 활동이 임기 전에 물러나야 할 사유가 되고, 개개인이 헌법기관이며 민주주의 수호기관인 국회의원들이 민주주의를 말살하는 절차에 동참해 거수기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원내사령탑에서 물러난 직후 그의 지지율은 급등했다.

당시 리얼미터의 국민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5%대였던 그의 지지율이 19.24%로 치솟으며 1위에 등극했다. 이는 새누리당 내에서 경쟁자 없는 1등자리를 지키던 김무성(18.8%)을 0.44% 차이로 따돌린 수치였다.

물론 이 컨벤션효과는 역시 일시적인 현상에 그쳤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이 나라를 지탱하는 국민들의 성숙한 민주의식이다.

유승민 파동은 무엇보다 원칙을 지키려하는 신념과 전횡을 지속하려 하는 권력의 궤변이 충돌하면서 발생했다.

하지만 정의를 버리고 불의를 택한 다수 여당 국회의원들에 의해 독재 아래 민주주의 수호기관이 복속되는 치욕의 현장을 국민들은 똑바로 응시했다.

전후 이데올로기 진영 나눔에 의해 부초처럼 민주주의에 편입됐던 그런 국민이 아니다.

4.19혁명 이후, 기본권은 권력에 대한 투쟁의 산물이고,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지켜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국민이 되었다.

기본권은 투쟁의 산물, 지키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이 나라 일단의 권력들은 55년 동안 민주주의라는 외피를 입고 실질적으로는 호시탐탐 국민 위에 군림하는 체제전복을 노려왔다.

그들이 누리는 권력이야말로 국민이 흘린 피의 과실인데도, 그들은 시대착오적인 눈으로 국민을 바라보았다.

왕권에 맹종하던 백성, 엄혹한 식민체제 속에서 굴종하던 백성, 동족끼리 둘로 나뉘어 상잔하던 백성, 위에서 하는 대로 따르며 군말 없는 유순한 백성, 짓밟히고 빼앗기고 업수임을 당해도 땅으로서 하늘의 언어를 몰라 침묵하는 무식한 백성이 그들 아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보라.

땅은 땅의 언어 속에 살고 땅 위에 발을 디딘 인간은 결코 하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 나라 국민은 불의한 권력의 발아래 짓눌린 채 깨달았다. 국민이 허락하지 않으면 권력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동토의 칼바람이 가르쳐 온 것이다.

격동의 세월, 수많은 국민들이 전도된 주객을 바로잡기 위해 투신했다.

그러나 번식하고 세습되는 권력의 이기적인 유전자는 전근대적 배열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무엇보다 국민이 지닌 이타적 덕목을 모자람의 소이연으로 폄하하고 깔보는 습성을 대물림하고 있다.

이 나라가 좌익과 우익이 분점한다고 보는 관점은 환상에 불과하다. 지배와 피지배의 갈림이 있을 뿐이다.

현재권력이 설정한 프레임이다. 시장의 독과점과 부와 권력의 집중은 평등의 언어체계를 무너뜨리고, 노예와 더부살이들을 양산했다.

이 헬조선에선 이념논쟁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다.

분배의 정의론 조차 경쟁에서 진 자들의 획책일 따름이고, 당장 안정을 해치는 반시장적 위협일 따름이다. 경쟁에 집중하기 위해서 공동선을 내팽개치고 권력에 맹종하는 이른바 '일베'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또한, 신분상승을 위해 현재에 집중하며 사회정의를 바로세우는 일에 유보적인 보수 세력이 10대와 20대 사이에서 급증하고 있다. 진보는 수적으로 수세에 몰렸다.

이 나라 정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고 믿고 막 나갈 수 있는 배경이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 권력이 영속을 꿈꿀 수 있는 배경이다.

하지만 진보는 여전히 굳세다. 민주주의의 탈을 쓴 권력이 치달을 수 있는 참상의 극단에서 치른 혹독한 학습이 골수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번식하고 세습되는 권력의 유전자는 전근대적 배열

더구나 이 정권은 전방위적으로 민주주의를 퇴행시키면서 구석구석 잠에 취해있던 진보를 깨우고 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집회의 자유가 부당한 권력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말인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암흑세계의 질서를 강요받는다는 말인가.

독재의 시계를 지닌 권력과 2015년 12월 사이의 층위는 실로 무간지옥이라 할 만하다.

헌법 1조 1항을 유린하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이 정권은 이 땅 위의 모든 진보를 지옥으로 몰아넣고 있다. 깨어있음을 속죄하고 오직 약육강식의 계명에 속박될 것이냐, 이 암흑세계에서 제 몸에 불을 붙이고 길을 내며 앞으로 나아갈 것이냐의 갈림길에 진보는 내몰렸다.

그런 고민을 강요당하는 자체만으로도 이곳은 헬조선이다.

또다시 그런 시대인가. 바위에 부딪치는 계란처럼 터져 널브러지고 지켜보는 이는 피울음을 울어야 하는가. 침묵으로 말하고 촛불을 들고 말하는 성숙한 도회적 의식과 태도는 야수의 이빨에 무참히 찢길 뿐인가.

돌아가야 하는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평등의 실현을 위해 시민들은 또다시 무수한 피를 흘려야 하는가. 이 도시를 갈아엎고 새로운 도시를 세워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현실을 핑계로 물러서야 할 가치가 아닌데도, 도처에서 현실 앞에 무릎을 꿇는 부패한 민주주의 수호자들과 권력이 진보를 밀어붙인다.

그러나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진보는 독재의 패악 못지않게 이념전쟁의 참상을 함께 학습했다. 다른 도리가 없다.

이곳에서 결판을 내야한다는 것을 시민들은 안다. 진보의 방법으로 민주주의의 의미와 원칙을 훼손하는 무리들을 이 도시의 심장부에서 추방해야 한다.

하지만 이 도시에서는 오직 절차를 통해서만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킬 수 있다. 그런데 이 불통 정권과 그와 궤를 같이하는 주체들은 절차를 부정하거나 목적에 악용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어쩌자는 것인가. 불공정하고 부정한 절차들이 반민주주의를 양산하고 있다.

4.19역시 '부정선거'라는 부당한 절차가 촉발한 것이다. 국정원의 댓글 공작 등으로 절차적 정통성을 의심받고 있는 이 정권이야말로 이제 한 발 물러서서 헬조선을 고민해야 한다.

역사의 심판을 피하고자 한다면, 언어와 사고를 억압하고 말살할 것이 아니라 절차의 신성성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민주공화국의 국민들이 절차에서 활로를 찾지 못한다면, 택할 수 있는 게 무엇이겠는가.

다가오는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에 유승민을 지지했던 국민들을 생각한다. 밀리고 밀렸지만 더 이상 물러 설 곳이 없는, 이제 자기를 감출 줄도 아는, 일도양단의 때를 아는 진보를 본다.

이 정권이 알아야 할 것은, 권력은 양날의 칼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