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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의 추억

윤복순/윤약국 약사

거실에 모기장을 쳤다. 그것 하나로 집안에 꽤 낭만이 있다. 모기장엔 별 구름 달 등이 있다. 불을 끄고 누워 주위의 불빛만으로 보면 마치 자연에 나와 있는 착각에 빠진다. 우리 집이 뒷동이라서 공원 학교 등이 바로 나의 뒤안이다.

창문을 다 열어놓고 모기장 안에 있으면 산에서 야영을 하는 것처럼 시원하다. 이런 분위기를 살려 나는 모기장을 텐트라고 부른다.

텐트 분위기에 취해 남편과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손을 잡고 천천히 걷다보니 여름밤의 낭만과 사랑이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떠오른다.

대학 다닐 때다. 3학년 때까지는 해보고 싶은 것 모두 경험하고 4학년 때는 국가고시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 흔한 미팅 한번 못해보고 3학년이 되었다.

그 당시는 아주 친한 사이도 아닌 지금의 내 남편에게 축제에 나를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황송 감사해 할 줄 알았는데 선약이 있단다. 빗나가면 안 되는데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학군단의 축제인 화랑무도회 때 그 남자가 나를 데리러 왔다. 선약이 있다고 해 아무 준비도 안 했는데, 엉겁결에 따라 나섰다.

시간 여유가 있다며 자기 대학교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했다. 과 사무실에 들러 당당하게 나를 자기 애인이라며 소개 시켰다.

“어머머 이 남자가 더위 먹었나.”

데이트도 몰래 숨어 하던 시절인데 어디 교수님 앞에서 감히.

화랑무도회에서 행운권을 뽑으면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고 못 뽑으면 걸어가자고 했다. 신은

그 남자 편 이었나 많은 행운권 중 하나도 당첨되지 않았다.

무도회가 끝났을 때는 여름밤이 로맨틱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행운권이 당첨됐어도 한없이 걷고 싶은 그런 밤이었다.

이미 차편까지 끊어져 밤새도록 걸을 수밖에 없었다. 밤이슬이 촉촉하게 내렸다. 그 남자가 겉옷을 벗어 나에게 걸쳐 주었다.

그 뒤로 그 학생이 거의 매일 약대로 나를 찾아왔다. 친구들이 “그 사람은 등록금 원대에다 내니 전북대에다 내니?”하며 놀렸었다.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잡은 손에 힘을 준다. 공원은 낮보다 밤이 더 매혹적이다. 부드러운 밤바람과 자귀나무 꽃의 향이 우리의 신혼 때만큼이나 감미롭다. 조금 더 걷다 들어가자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리를 껴안았다.

우리의 신혼살림은 자취생활과 똑 같았다. 냄비 하나 숟가락 두 개로 월세 방에서 시작했다. 그 당시 우리의 재산은 트렌지스타 라디오 뿐이었다.

대구의 여름은 무지무지 더웠다. 부엌 겸 목욕탕으로 쓰고 있던 창고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입으면 금방 땀이 다시 배었다. 선풍기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불평 한마디 할 줄 몰랐다. 그냥 좋기만 했다.

밤마다 남편과 안집 옥상에 올라갔다. 라디오 다이얼을 이리저리 맞추다 보면 TV드라마의 대사가 잡혔다. 앞집이 문을 다 열어놓고 대청마루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아마 국민 드라마였을 것이다. 우리들의 눈은 앞집 TV에 귀는 라디오에 맞추며 인기 드라마를 즐겼다.

옥상에서 밤늦게까지 몸을 식히고 들어와도 방은 한증막이었다. 우리 방이 허청을 개조해서 만든 것이라서 내열재 같은 것이 하나도 들어있지 안았다. 신혼인데다 여러 집이 함께 세 들어 사니 모기장을 치고 문을 열고 잘 수도 없었다.

엄청난 남편의 사랑이 있어도 열대야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남편이 대야와 수대에 물을 받아왔다. 나는 대야에 남편은 수대에 발을 담그고 꼬박 밤을 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으로 재미있던 우리의 신혼생활이었다. 대형 TV에 에어컨이 있다한들 그때만큼 재미있고 아름다울까.

“우리 신혼 때 참 낭만적으로 살았어?”

“낭만이 펄펄 끊었지.”

한없이 걷고 싶은 그런 밤이다. 여름밤의 마력이다.

집에 돌아오니 모기장이 반긴다. 며칠 전 딸네 식구들이 와서 하루 저녁 자고 갔다. 손자 손녀들이 처음 보는 모기장에 호기심이 발동해 들락날락 했었다.

네 살짜리 손녀딸이 내 팔을 베고 누워 큰 구름은 아빠구름 작은 것은 민희구름, 큰 별은 엄마별 작은 별은 오빠별 하며 좋아서 쫑알거렸다. 내가 어릴 때는 마당에 멍석을 깔고 모깃불을 피우고 모기장의 별 구름 달이 아닌 하늘의 별을 보며 할머니의 얘기를 재미있게 들었는데.

거실의 모기장 때문에 여름밤의 추억이 하나 더 만들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