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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지키는 대통령

국제NGO 삼동인터내셔널 이사장

익산시 사회복지협의회 회장

김 영 주

일시(一時)에 자동차 뒷유리에 "내 탓이오"라는 문장이 새겨진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것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스티커를 자동차 뒷유리에 부착하면서 국민적 회개 운동으로 전개된 것이다. 잘잘못을 따질 때 일단 ‘네 탓’부터 하고 보는 세태를 반성하자는 의식 개혁 운동이다

지난 1995년, 당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발언이 새삼 실감 나는 정치 계절이다. 이 회장이 중국 베이징 방문했을 때 한국 베이징 특파원 간담회에서 거침없이 우리의 구태 정치를 나무랐다.

그는 “우리 정치인은 4류, 관료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수준”으로 평가했다. 그러더니 “2류였던 기업은 세계 일류가 됐는데 정치와 행정은 여전히 3류, 4류에 머물러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도 혹평했다. 참으로 대단한 배짱이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집권층인 YS 문민정부는 물론 여당인 민자당, 야당인 평민당은 정치폄훼라며 씩씩거렸다. 여기에 YS에게 팽당한 뒤 그해 6.27 지방선거를 통해 정치무대에 막 등장한 자민련까지도 '이건희 막말'로 공격을 퍼부었다. 또한 일부 신문, 방송, 뉴스 통신들도 이 회장의 공격대열에 섰다. 옳은 지적을 해놓고도 코너에 몰린 이 회장은 공항 귀국장에서 유감 표명으로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런 뒤, 그는 회사에 돌아가 선친(故 이병철 前회장)의 유언을 소개했다. 그는 “우리 아버지가 제게 마지막 남긴 유언이 무엇인 줄 아느냐. 딱 두 자, ‘경청( 傾聽)’이었다. 쓴소리일수록 귀를 기울이라는 말씀”이었다고 했다.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으나, 그가 ‘정치 4류 발언’은 무려 27년 전이니,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렇다면 4류 저질 정치로 평가받고 펄쩍 뛰던 우리의 정치는, 지금 1류가 됐을까.

지난 3.9 대선을 통해 윤석열 정부가 들어섰지만, 권력을 쥔 여권 인사들은 국민의 소리는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오직 전임 정권의 실정을 비판하기 바쁘다. 물론 전임 정권의 정책 중에 몰고 온 패착( 敗着)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렇다고 미래를 지향해야 하는 윤 정부가 언제까지 전임 정권의 실정과 책임을 붙들고 탓만 할 건가.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나라는 전임 정부의 잘 된 정책은 정파를 떠나 그대로 계승한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는 것이다. 사소한 약속이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성공할 수는 없다.

조선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정승으로 봉직했던 정홍순(鄭弘淳, 1726~1784)이라는 분이 있었다. 정홍순은 비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갈모(葛帽)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기 위해 늘 두 개씩 가지고 다녔다. 하루는 당시 왕이었던 영조의 행차를 구경한 뒤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침 비가 내렸다.

정홍순은 급히 갈모를 쓰고 옆을 보니 한 젊은 선비가 갈모가 없어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선비에게 갈모를 하나 빌려주고, 가까운 골목 어귀까지 함께 걸었다. 이윽고 서로의 집으로 가기 위해 정홍순이 갈모를 돌려받으려 하자 젊은 선비는 간곡히 요청했다.

“죄송하지만, 비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니 갈모를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내일 되돌려 드리겠습니다.” 몇 번이나 간절히 부탁하는 젊은 선비의 말에, 그는 자기의 집을 알려주며 갈모를 빌려주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그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결국 갈모를 돌려받지 못한 채 세월이 흘렀고, 정홍순은 20여년이 지나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부임한 호조좌랑이 인사차 찾아왔는데 예전에 갈모를 빌렸던 젊은 선비였다.

정홍순은 그에게 말했다. “한낱 갈모를 돌려주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작은 약속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백성과의 약속인 나라의 살림을 공정히 처리할 수 있겠는가?”

그 호조좌랑은 결국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했다고 한다. 약속의 무게와 상관없이 이를 지키기 위해서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에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참으로 중한 일이다. 그래서 약속을 잘 지킨다는 것은 신뢰를 주고받는 표현이다. 신뢰에 경중이 없는 것처럼 약속에도 작은 약속, 큰 약속이 없다.

미국의 철강 재벌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는 “아무리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 번 약속한 일은 상대방이 감탄할 정도로 지켜야 한다. 신용과 체면도 중요하지만, 약속을 어기면 서로의 믿음이 약해진다. 그래서 약속은 꼭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유독 약속도 잘 안 지키고, 겸손도 갖추지 못하는 맹신과 불신의 대표적인 곳이 우리나라 정치권이다.

정치 현실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모두 필요하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게 있다. 왜 그럴까? 역사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살아서 움직이며 늘 변용한다. 그래서 보수적 시각을 갖고 있더라도 진보적 시각으로 대처해야 할 때가 있다. 반대로 진보적 시각을 갖고 있더라도 보수적 시각으로 대처해야 할 때도 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 6개월이 넘어간다. 지금이라도 국민의 소리를 경청하고, 자기들만의 정치(독선)에서 함께하는 정치(협력)로 돌아서야 한다. “야당과 협치하며 국민을 잘모시겠다” “국민통합이 최우선 과제다” “정치보복 않겠다” 등의 대선공약이야 말로 진짜 약속 중의 으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