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속 앨범에서 할머니 환갑사진을 꺼냈다. 사진은 가로 15cm, 세로 11cm의 빛바랜 흑백이다. 보존 상태는 양호하고, 요즘 사진보다 두껍다. 이 사진은 1967년 가을걷이를 끝내고 환갑잔치 때 촬영하였다. 당시 농촌지역 사진이 귀한데 우리 집안 추억의 옛 사진이다. 사진 뒤 초가집은 부모님이 기거하셨던 곳이고, 사진 좌측은 할머니 방, 골방과 부엌이 있다. 갓난아이를 지나면서부터 할머니 방에서 대학 때까지 생활했었다. 집 뒤로 최씨 아저씨네 대봉 감나무가 보인다.

사진 속에는 갓 백일 된 아이부터 환갑인 할머니까지 60년이란 세대 차가 있다. 어린이들은 맨 앞 돗자리에 앉거나 서 있다. 어려서 그런지 앉은키나 서 있는 키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주인공 좌우에 7촌 할머니 두 분이 의자에 앉아있다. 그 뒤에는 할머니 형제?자매와 그 자녀들이 빼곡하게 서 있다. 채씨 문중의 근대 기록문화유산이다.

부모, 고모와 고모부, 당숙과 당숙 조부모, 진외가의 조부, 아이인 나를 앉고 있는 숙부 …. 평강채씨소감공감파 절제사공 옥강정·중원·무동 문중의 4대조 채동형 후손과 친인척들이다. 사람 수를 하나, 둘 세어보니까 모두 42명이다. 4대 9촌 관계의 친인척들이 모여있다. 사진 속 얼굴들은 할머니 집에 자주 들락거려 어린 시절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역시 사람의 이목구비는 어려서나 늙어서나 바뀌지 않는 것 같다.

이제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이처럼 친인척들이 애경사 때 모이는 것은 먼 전설이 되었다. 아내와 자녀들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내는 성인이 된 친인척들의 어리고 젊은 시절 모습들을 훑어보면서 신기하다는 표정인데 자녀들은 무덤덤하다.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 투영된 사진과 그 2세들이 바라보는 사진이 절대 같은 느낌으로 전해질 수 없다. 그래도 그 사진 한 장은 족보와 가계도보다 감동과 추억을 사람 수만큼 배가시켜 준다.

환갑잔치에 초대된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이는 어느덧 장성하여 56세가 되었고, 국민 학생인 꼬마들은 어느덧 60대가 되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대부분 돌아가셨다. 세월에 장사가 없다.

사진 속 43명 중 살아계신 사람은 절반인 22명이며 1년에 서너 번씩 만나고 여행을 즐긴다. 돌아가신 21명 중 고종관계인 사람들은 마을 앞 선산에 옹기종기 잠들어 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서로 곁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지내고 있다.

그 자손들이 더욱 번성하여 벌초와 성묘, 시제를 모시고 있다. 추석을 앞둔 벌초 때면 20~30명씩 모여서 제초작업을 하고 의례적으로 멧갓에서 점심 식사를 나눈다. 식사하며 오순도순 얘기하다 보면 해마다 화제는 언제나 옛 시절로 돌아간다. 부모님 세대와 하나가 되어 추억 속에 노닐곤 한다. 막걸리 한잔하다 보면 예취기 엔진소리보다 옛이야기로 웃음소리가 동네까지 울려 퍼진다. 벌초한 산소에 잠들어 있는 어르신들이 금방이라도 깨어서 걸어 나올 듯싶다.

   

환갑 때 배경이 됐던 초가집을 동네 사람들은 구석 집이라 불렀다. 언덕을 깎아 구석진 곳에 자리하여 마을 길에서 잘 보이지 않기에 붙여졌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4년에 그 자리에 최신식 이층집을 지으면서 비로소 구석 집 신세를 면했다.

 
1990년대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께서 혼자 살고 계신다. 사진 속 아이였던 나는 그 집에서 청소년기까지 보내고 1995년에 분가하여 익산 시내에 살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 장손 집에 해마다 수백 명이 들락거렸다. 어머니는 제집 드나들 듯이 찾아오는 친인척들과 손님들에게 밥을 해주셨다. 4대 고조부 입향조 이후 끈끈한 씨족공동체로 다져진 집터이다.

환갑은 태어난 간지의 해가 다시 돌아왔음을 뜻한다. 1970년에 평균 수명이 여자 65.5세, 남자 58.6세였으니까 할머니께서는 당시 평균 나이를 사셨고 그러고도 82세까지 장수 하셨다. 반면에 할아버지가 39세에 아버지가 59세에 작고하셨으니까 우리 가족 남정네들에게 장수는 누가 뭐래도 그 자체로 축복이다. 이제 내 나이 60세를 바라보는 50대 중년이 되었다. 우리 할머니 환갑사진을 다시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때 그 시절처럼 친인척 간에 우애하며 건강하게 오순도순 잘 지내며 영원한 내 고향 무동길 27-3에서 살고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