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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덧

나는 변화에 익숙하지 못하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기계치다. 전자제품 조작하는 것이 겁나서 세탁기 돌리는 것도 남편 몫이다. 며칠 전 보일러를 교체했다. 출근할 땐 ‘외출’로 놓으면 된단다. 나는 전원을 눌러 아예 다 끄고 나온다. 새 보일러와 친해지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다.

나는 아침이면 신문을 읽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사전에서 찾는다. 그 흔한 컴퓨터도 활용할 줄 모른다. 나는 옛 것에 친숙하고 친근하다. 천성이 느긋하고 지금의 수준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한다.

사람들은 더 빠르고 편한 것을 원한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세상과 소통하고 실시간의 뉴스를 얻어내고, 실제를 뺨치는 사이버 공간과 만난다.

나는 얼굴을 맞대고 얘기하고 싶고 내 마음을 한자 한자 적어 편지를 쓰고, 집중을 다해 책을 뒤적이며 세상을 알아가는 재미를 즐긴다. 모두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데 나 혼자만 전통 방식을 지키고 있는 격이다.

얼마 전 문학카페에 가입을 했다. 모두들 온라인상에서 얘기를 한다. 나 같은 아날로그 방식으론 어디에서도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지금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아 가는데 심한 입덧을 앓고 있다.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나는 심한 입덧을 했다. 무엇이든 먹는 족족 토했다. 14~16주 정도 지나면 없어진다는데 나는 임신 내내 입덧을 했다. 나는 요즘 컴퓨터를 익히면서 또 입덧을 한다. 입덧은 태아가 모체로부터 뭔가를 받아먹기 시작한다는 소통의 신호다. 내 컴퓨터 실력은 겨우 의료보험으로 처방전이나 입력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답글을 올리며 소통을 하려니 입덧이 심할 수밖에.

나는 틈틈이 책을 읽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을 좋아한다. 이면지에 글을 쓰고 고치고 다듬고 빼고 보태며 내 나름의 작품을 만든다. 나를 닮은 나의 글씨로 깨끗하게 정리하여 적어둔다. 나는 독수리 타법으로 한글만 칠 수 있다. 쓰는 것에 바빠 몇 줄을 치고 보면 중간에 오자가 있고 띄어쓰기도 엉망이다. 그것을 고칠 줄 몰라 싹 지우고 다시 치고 있다.

한번은 작품실에 써야 할 글을 명수필난에 써서 2시간에 걸쳐 옮겨 쓴 글을 한순간에 다 지우고 말았다. 행여 그 순간에라도 누가 읽을까봐 내 가슴이 얼마나 콩닥 거렸던지. 한글로 들어가 저장했다 불러오기를 하라는데 현재의 내 수준으로는 조금 어렵다.

영어 대문자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몰라 약 사러 온 학생한테 물어서 입력할 수 있었다. 漢字를 써야 할 경우도 있다. 글자를 쓰고 옆에 한자를 넣어줘야 하는데 자판위의 ‘한자’를 아무리 눌러도 한자가 나오지 않는다. 딸아이한테 전화를 할 수밖에. 글자의 크기를 12로 정하고 글을 쓰는데 한 꼭지 쓰고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면 글자가 다시 작아진다. 컴퓨터가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가슴이 철렁했다.

하루는 제약회사 직원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나에게 e-mail 주소를 요구했다. “할 얘기 있으면 편지로 해”라며 슬쩍 넘겼다. 정보 선진화 어쩌고 하면서 앞으로는 세금계산서를 전부 이메일로 보낼 거란다. 이래저래 컴퓨터는 대세다. 전통방식을 고수하더라도 현재를 살려면 컴퓨터를 모르고는 힘든 세상이 되었다.

주말에 농협에 근무하는 아들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이메일 주소와 비밀번호를 기억하기 가장 쉬운 것으로 적어줬다. 빨리 익숙해지라며 아들이 몇 번 이메일을 보내었다. 편지 읽기는 할 수 있다. 편지쓰기도 겨우 한번 해봤다. 그 뒤로 내 글을 입력할 때 알아야할 것들을 몇 가지 더 알려줬다 “가장 기초적인 것만 익히면 안 될까?” “엄마는 전문직이니 여기까지는 알아야 지요” 한번에 기억하기엔 너무 복잡하다. 몇 번의 시행착오가 더 있어야 될 것 같다.

입덧이 심할수록 똑똑하고 건강한 아이란다. 영리한 아기는 중요한 신체기관이 만들어질 무렵 자신에게 해로운 음식이 들어오면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입덧이 심한 것 이란다.나 같은 기계치가 내가 필요로 하는 만큼 컴퓨터를 마스터하기 까진 얼마나 더 입덧 기간을 거쳐야 할까.

임신 내내 입덧을 하고도 건강하고 똑똑한 딸아이를 낳았다. 나는 컴퓨터와 긴 입덧을 거쳐 컴퓨터의 여왕으로 등극할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