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윤약국 약사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출근했다. 가끔 한 번씩 약국에 들르는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할머니 많이 기다리셨어요?" 미안해서 목소리를 높이며 반갑게 맞았다. 할머니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얼마나 많이 아프시면 저럴까 걱정을 하며 '제가 늦게 나와서 화  나셨어요?"  약 제일 좋은 걸로 드리겠다며 어린양 비슷하게 아양을 떨었다.  "청심원이나 하나 줘봐" "속상한 일 있어요?"

마음에 담고 있으면 화병 생기니까 저한테 다 얘기 하세요.  오늘 하루 종일 다 들어드릴께요.  할머니 입모습이 조금 변했다.

할머니는 아들네 집에 올 때마다 우리 약국에 들른다고 했다. 어제 오셨단다.  당신이  오면 아들 며느리가 싸움을 한단다. 어제 저녁에도 싸우고 며느리가 나가서 지금까지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집에 돌아가면 다시는 안 와야지 맹세하고 가지만, 자식이 뭔지 솔깃하게 보고 싶고 걱정이 돼서 다시 오게 된다며 또 눈물이 글썽글썽 해진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그 사이 며느리가 왔을지 모르니 들어가 봐야겠단다.

고부간의 갈등, 물론 나에게도 있었다. 내가 결혼하던 해에 이리역 폭발사고가 났다.  그 당시 시아버지는 이리역에 근무 하셨다. 시아버지는 그날 그 사고에 대한 책임으로 구속까지 되었다. 평화롭던  우리 가정이 백팔십도로 변했다.

논농사는 남의 것이 잘되어 보이고, 자식 농사는 내 자식이 잘 나 보인다고 했던가. "애비는 운이 좋다, 모든 것을 애비가 하자는 대로 해라. 너는 애비 운 따라 오려면 택도 없다." 결혼 초 시어머니가  나에게 하신 말씀이다.

나는 내가 한 번도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사로 알아  들었다.  그런데  집안에 새 사람이 들어오고  좋지 않은 일이 생겼으니 예삿일은 아니었다. 나는 나하고 연관 짖고 싶지 않았다.   자연히 갈등이 생길 수밖에.

남편이 작은방으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별 것 아닌 것도 어머니 앞에서는 어머니 편을  들고, 나를 많이 나무랄 테니 그렇게 하자는 것이다.

시부모랑 같이 사는 것도 아니고 어쩌다 한번 그까짓 연기 좀 못 하겠는가. 연극만 끝나면 남편은 고스란히 내 편이 될 텐데.   

시어머니 앞에서 연기는 한두 번으로 족했다.   남편에게 시어머니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것도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나의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여러 면에서 내가 월등하게 위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젊고, 학력도 높고, 돈도 벌고, 시어머니세대 보다는 고생도 덜 했고, 여자로써 남편에게 사랑도 더 많이 받고 살고......  이런 내가 백번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더 이상 내 신경을 자극하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얘기 하시면  나는 모두 인정 한다는 예 예 대답을 한다. 백전백승 시어머니의 승리다. 이런 일방적 게임은 재미가 없는 법이다. 그 뒤부터 시어머니는 "너는 참 성격이 좋다"며 나를 칭찬해  주셨다.

약국 문을 닫으려는데 시댁에 갔다 왔더니 속이 갑갑하다며 젊은 주부가 약을 사러 왔다. 그녀의 남편은 원래  입이 짧아 마른 편이란다. 거기다 며칠 전 사무실에서 체육대회가 있어 얼굴이 많이 그을렸단다.

"애비가 왜 저러냐?"  너는 도대체 신경을 어디다 쓰냐며 시작된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장장 두 시간 이어졌단다.  정말 시댁에  가기 싫다며  나에게 원정을 구하는 눈치다.

나는 아직 시어머니는 아니다. 머지않아 곧 된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끼리 만나서 가족을 이루다 보면 예상 못 한 일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한 일도 내  맘에 들지 않을 때가 많지 않던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조금 손해 보고 살면, 내 주변이 편안하고, 내 주변이 편안한 것이 곧 내가 편안한 것임을 알았다. 며느리를 얻고도  지금같이 살면 되지 않을까.

우리 시어머니는 연세에 비해 건강 하시다. 지난 어버이날에 시어머니께 용돈을 드렸을  때다.
"웬 돈을 이리 많이 주냐?"

 "제가 고맙습니다."

시어머니가 아파서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계신다면 이 돈만 들어가겠는가. 당신은 아파서  고생이고, 나는 돈 대며 병문안 다니느라 고생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시어머니가 고맙기 그지없다. 그리고  많~이 이쁘다.(이렇게  표현해도  될까?)

매달 시어머니께 생활비 보내드리면서도, 시어머니가 건강해서 병원비 안 들어가니 큰  재산 물려받은 것 같아 나는 기분이 좋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생각의 전환이  고부간의 갈등을 좁혀주는 지름길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