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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박남

윤복순/윤약국약사

퇴근 후 가장 편안한 자세로 남편과 TV보는 시간이 즐겁다. 아무리 재미있는 프로라도 혼자 보면 재미가 반감된다. 농사철엔 같이 TV를 보다 나는 웃는데 아무 소리가 없어 쳐다보면 남편은 어느새 졸고 있을 때가 있다. 요즘은 농한기라 TV보면서 같이 웃고 같이 놀라고 TV보는 재미가 두 배다.

몇 해 전 외래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프로가 있었다. 그 때 배웠는데, 키 크고 잘 생기고 능력되고 성격 좋고 배려해 줄 줄 알고 집안 좋고 등등 가장 매력적인 남자를 뜻하는 킹카를 우리말로 바꾸면 쌈박남 이란다. 쌈박한 남자라는 뜻일 것이다. 쌈박하다는 물건이나 어떤 대상이 시원스럽도록 마음에 든다, 일의 진행이나 처리 따위가 시원하고 말끔하게 이루어진다라는 뜻이다.

그 때도 남편과 같이 TV를 보았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검지를 앞으로 천천히 구부리며 “쌈박남, 얼른 들어가서 잡시다.” “알았어 쌈박녀” 우리 부부는 이래서 웃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응용한다. 그리고는 금방 잊어버린다.

지난 일요일 용화산에 갔다. 오랜만에 갔더니 새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다. 둘레길을 새로 만들었다는 안내다. 그 표시대로 걷기로 했다. 둘레길엔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다. 한 곳에 ‘소세양 신도비길’이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다. 처음 보는 글이라 궁금증이 생겼다. 바로 옆에 천호성지가 있는데 천주교 신자가 걸었던 길이라는 걸까. 소세양은 사람 이름 일까. 둘레길을 걷는 내내 무슨 뜻일까 온 상상력을 다 발휘해 봤지만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컴퓨터부터 켰다. 소세양은 사람 이름이다. 예조판서를 거쳐 한성부판윤에 올랐던 사람이다. 신도비는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임금이 내린 비석으로 무덤의 동쪽이나 남쪽에 세운다고 한다. 신도비는 무덤으로 가는 길 안내비로 그 사람에 대한 업적 등을 적었단다. 신도비를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가문에 큰 영광은 물론이고, 익산 시민인 나도 영광으로 생각 되었다.

소세양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색에 혹하는 자는 사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자기는 어떤 미인을 만나더라도 유혹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친구들과 내기를 하였단다. 30일만 같이 살면 능히 헤어질 수 있으며 추호도 미련을 갖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쳤단다. 그 미인이 바로 황진이다. 그 당시 누구든 황진이에게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를 못했으니까.

소세양이 황진이에게 榴(석류나무 류)자를 적어 보냈더니 황진이는 漁(고기 잡을 어)자로 화답을 보냈더란다. 이것은 큰 선비가 여기 있는데 어찌 놀지 않겠는가라는 뜻이고, 높은 기생인 나도 안 움직이니 네가 직접 와서 말하라 라는 뜻이란다. 수작을 거는 쪽이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이나 보통 재치가 넘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서로 통했고 사랑에 빠졌다. 이런 풍류와 멋을 아는 그들이 진정한 쌈박남 쌈박녀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쳤다.

계약 기간 한 달이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갔고, 이 아쉬움을 황진이는 이런 시로 남겼다.

소세양과 이별을 맞이하여
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
서리 맞은 들국화는 노랗게 피었구나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오가는 술잔은 취하여도 끝이 없네
흐르는 물은 거문고와 같이 차고
매화는 피리에 서려 향기로와라
내일 아침 임 보내고 나면
사무치는 정 물결처럼 끝이 없으리

자신만만했던 소세양도 이 시 앞에선 결국 주저앉고 말았단다. 그러나 비록 한 달이란 계약은 어겼지만 며칠 뒤 황진이와 이별하고 소세양은 판서 홍문관 우찬성, 좌찬성이 되었단다. 그 후 노모를 모시기 위해 사직을 하고, 익산 용화산 자락 진주 소씨 마을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율시에 뛰어났고 ‘송설체’ 글씨를 잘 써서 필명도 높았단다.

소세양은 황진이가 사랑한 마지막 남자라고 한다. 재색을 겸비한 최고의 명기 황진이와 사랑과 이별을 한시와 시조로 나눈 소세양의 능력에 호감이 생겼다. 그들이 주고받은 시조들에 재치가 톡톡 튄다. 소세양신도비길을 내 맘 대로 쌈박남 쌈박녀길로 바꿔 부르기로 했다. TV에서 배운 쌈박남 때문에 둘레길에 얽힌 얘기가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돌아다니면서 하는 독서라고 한다. 요즘은 책읽기가 조금 게을러졌다. 눈이 금방 피로해지기 때문이다. 근시가 심한 나는 책을 볼 때는 안경을 벗고 본다.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 책을 보지 못한다. 자연 퇴근 후 TV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말았다. TV가 일부 독서를 대신 해 주는 셈이다. 오늘도 신나는 정보가 없나 웃을 거리가 없나 TV앞에 앉았다.

* 송설체-한자 서체의 하나로 중국 원나라 때 조 맹부의 글씨체로 그의 호를 따서 송설체라고 한다. 필법이 굳세고 아름다우며 결구가 정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