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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에

윤복순/윤약국 약사

올해는 새해 해맞이를 하지 못했다. 연말에 친정 식구들의 모임이 있었다. 막내 여동생이 의대 교수에 임용됐다고 한잔, 조카며느리가 매니저가 됐다고 한잔, 조카가 외고에 합격했다고 한잔, 다른 조카며느리가 셋째 아이를 가졌다고 한잔, 이러다보니 남자들이 과음을 했고, 새벽에 운전해 줄 사람이 없었다. 여자들끼리만 갈 수도 있었지만 극성을 부리지 않기로 했다.

해맞이를 못한 것은 서운하지만 친정 식구들 가정에 좋은 일이 있어 모두들 기분 좋게 한해를 보내고, 웃으며 새해를 맞이할 수 있어서 좋았다. 대전으로 광주로 서울로 언니들 내외분 동생내외를 보내고, 익산에 사는 동생들도 모두 각자의 집으로 가고 다시 우리 부부만 남았다.

우리 애들은 오지 못했다. 딸은 시댁으로 갔고, 아들은 승진 시험을 눈앞에 두고 있어 연말이니 연시를 잊고 도서관에서 열공 중이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맨 처음 새해 해맞이를 갔던 때를 떠올려 봤다.

오래 전이다. 15~16년 전이지 싶다. 새벽 6시에 자명종을 맞춰놓고도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보신각 종소리를 듣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어린아이 마냥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새삼스레 나이가 어려지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떨리고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과연 서해에서 해가 뜰까?

식구들 끼리 새해 첫 날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한 해의 소원을 빌러 가려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특별히 첫 해의 일출을 보기 위해 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젊어서는 부대의 연말연시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매년 전방에 갔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신문에서 큰 행운을 잡았다. 동해로 가지 않고도 해맞이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서천에서 말이다. 이것은 나에게 가슴 벅찬 축복이었다. 당장 실천에 옮기기로 했다.

비록 새해 첫 해는 아니지만 해맞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중학교 수학여행 때였다. 경주로 갔다.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여행 동안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는데 해맞이를 간다며 모두 깨웠다. 잠도 덜 깬 눈으로 허겁지겁 토함산에 올랐지만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도 울릉도 성인봉에서도 일출은 보지 못했다.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일곱 번째 올랐는데 일출다운 일출은 한 번도 못 봤다는 옆 사람의 말에, 나는 첫 번째 올라 일출을 보려고 했으니 욕심이 과한 거라며 쉽게 마음을 돌렸었다. 자연의 오묘함 앞에서 인간의 의지는 별 것 아닌 것 같았다. 애들이 서해안으로 일출을 보러 간다고 하니까 이상해 했다. 확인을 몇 번씩 했었다. 못 미덥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해의 낙조니 일몰이니 하는 멋있는 사진이나 작품을 본 적은 있지만, 서천의 일출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에게 일단 가보자고 했다. 신문에 났으니 거짓은 아니지 않겠느냐고 설득을 했다. 그리고는 지도책을 펴놓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해 보았다. 동지 넘어서는 해가 남동쪽에서 뜨고, 음~ 서천은 남동쪽도 아닌데. 지구는 둥그니까, 지도는 평면으로 있기 때문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도 실제로는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축도 23.5도 기울어져 있으니 서해에서도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걸까.

나는 신바람이 났다. 서해안에서도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처음 알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애들을 불러 놓고 이론에도 없는 설명을 해댔었다. 애들은 여전히 반신반의 하면서도 꼭두새벽부터 새해 일출을 구경하러 가는 것에는 적잖이 흥분된 모습이었다. 한 번 필이 꽂히면 기어이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을 아는 남편은, 이렇다 저렇다 말없이 무조건 내 편을 들어줬다.

해맞이 길은 두어 번이나 잘못 들었다. 여러 번 다녀본 길이건만 시간을 맞춰야 한다는 부담감에 빠른 길을 찾다 보니 오히려 더 돌아가야 하는 길이 되고 말았다. 차 안에서 시계를 보며 훤히 밝아오는 밖을 보며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마량리 포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향해 솟아오를 해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을까. 금방이라도 해가 뜰 것 같아 마음은 더 바빴다.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끼인 줄도 모르게 나도 자리를 잡았다.

마치 내가 자리 잡기를 기다렸다는 듯 바다 저편이 붉게 물들었다. “야, 저기”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수줍은 색시같이 해가 조금 아주 조금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성큼 성큼 올라오는 것이었다. 소원을 빌 마음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고 있었다. 해가 오르면 오를수록 더 크게 박수를 쳤다. 가히 장관이었다. 사람들은 미친 듯이 사진기를 눌러댔지만 나는 박수만 치고 있었다. 순식간에 해는 바다에서 하늘로 가 있었다. 눈이 부시고 정열적이어서 감히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황홀함에 질식되어 발을 옮기지 못하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이 순간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동해로 갔다. 그러나 나는 멀다는 이유로 , 첫 날을 가족과 같이 보내야 한다는 이유로 툭 털고 떠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이토록 멋진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다. 새해 소망은 빌지 못했어도 아름다운 일출을 본 것으로 모든 소망이 이루어질 것 같았다. 매 년 이곳에서 해맞이를 했겠지만 나는 그 때 처음 알았다. 이것이 행운이고 대운이 터진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왠지 좋은 한 해가 될 것 같았었다.

그 후 여러 번 그곳으로 새해 일출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서해에서 일출을 볼 수 있는 것은 마량 리의 지형 때문이라는 것도 알았다. 마량리가 마치 갈고리 모양이란다. 즉 서해를 향해 가다가 다시 내륙으로 굽어서 돌아선 지형의 끝 지점에 마량리가 있다는 것이다. 마량 리는 방파제 같은 구실을 하며 바다를 껴안고 있어서 바다 위로 뜨는 해를 볼 수 있단다. 이곳에선 11월 중순부터 2월 중순까지만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임진년 새해 해맞이는 못했지만 가까운 일요일에 마량 리로 일출을 보러 가야겠다. 어제 밤 축하했던 모든 일들에 감사하며, 그때처럼 떠오르는 해를 보며 실컷 박수를 쳐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