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윤약국 약사
며칠 전에 새 일기장을 선물 받았다. 나는 맨 앞에다 “외모에 신경 쓰는 해”라고 적어 놓았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에서 현상수배범 같은 무표정한 모습을 보았다. 나쁜 생각도 안 하는데 왜 범죄형의 얼굴이 되었을까. 매일 매일 좋은 생각만 하면서 산다고 자부했는데, 거울 속에는 예쁘고 환한 얼굴 대신 양 볼이 축 쳐지고 심통 부리는 얼굴이 있는 것이었다.
약국을 처음 개업했을 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약사의 인상이 너무 좋다고 했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내가 언제나 웃는 얼굴이라서 화가 난다고도 했다. 날마다 무슨 좋은 일이 그리도 많을까 질투가 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 부터였는지 모르겠다. 매일 돈을 만지기 때문에 욕심이 생겼을까. 나이 먹어감일까. 웃음이 줄어든 것도 같다. 신나는 일도 기쁜 일도 차츰차츰 줄어갔다. 세월이 흐르는 만큼 기쁨의 척도도 인플레가 되는가 보다.
지루한 장마 끝에 날이 들면 환호성을 질렀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볕에서 행복을 느꼈었다. 좋은 시 한 편에 부자가 되었었다. 모두가 감사할 일이고 살 만하고 넉넉했다.
요즘 서점에 가지 않은지가 1년도 넘는다. 어느 날은 책 한 장도 못 읽는 날도 있다. 간절히 원하는 것도 없다. 적당히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미장원에 갔다. 외모에 변화를 주기 위해 파마를 해 보기로 했다. 오랫동안 단발머리를 했기 때문에 어떤 얼굴이 나올까 걱정이 되면서도 기대도 되었다.
미용사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지만 나는 알아서 해주라고 하고는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미용사는 내가 편안해 보인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행여 머리 모양을 망쳐 놓을까 눈을 크게 뜨고 미용사를 지켜본단다.
생각해 보니 너무 무관심 했던 것 같다. 내 자신을 가꾸기 위해 노력은 고사하고 기초 조사도 없었던 것이다.
언제나 젊다는 이유로 있는 그대로 살았다. 어떻게 하면 더 예뻐 보이고 인상 좋게 보일까 연구해 본 적도 없다. 나에게 맞는 헤어스타일을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저 편하고 간단하면 좋았다.
이번 참에 머리 모양도 바꾸고 화장도 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미용사가 “얼굴에 잡티가 많아서 화장 좀 해야겠어요” 한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내 얼굴이 좋아보이지는 않는 모양이다.
파마가 된 내 얼굴은 엉뚱하게도 내 모습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보름달 만큼이나 큰 얼굴이 더 평수가 넓어 보였다.
미용사가 자존심 머리를 세워주고 이리저리 손질을 해주었지만 내가 보기엔 ‘영 아니올시다’였다.
시간과 돈을 투자했는데도 거울 속에는 여전히 심술 난 아줌마가 불만족스럽게 서 있는 것이다. 입술을 바르고 눈썹을 그려 보았다. 예쁘고 좋은 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애꿎게도 거울만 탓하다 돌아서고 말았다.
자신만만하고 인상 좋던 얼굴이 왜 심통 난 얼굴로 변했을까. 나는 육체적으로 아픈 곳이 없다. 마음도 건강한 편이다.
지극히 평범한, 상식이 통하는 생활을 한다. 특별히 부족한 것도 없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청어 물탱크에 숭어를 몇 마리 함께 넣어 오면, 청어는 숭어에게 잡혀 먹히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도망을 다닌다고 한다. 언제나 정신을 바짝 차려 죽을 시간도 잊는다는 것이다.
나는 무릎을 쳤다. 삶의 긴장! 그 동안 긴장의 이완이 나를 악마로 만든 것이었다.
내 인생에 숭어가 없어진 것일까. 적당히 긴장한 삶은 활력이 된다.
그 활력은 젊음을 가져오고 기쁨도 준다. 나이 먹었다고 조금은 포기하고 안주한 나는 긴장을 잃었다.
활력 잃은 얼굴이 환하고 예쁠 수는 없다. 좋은 인상일 수는 더더욱 없다. 외모는 겉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파마를 펴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책상 주위를 둘러보니 언제 때 사둔 김성동님의 천자문책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올해는 천자문이나 배우자.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가슴 뛰고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다시금 내 얼굴에도 활기가 넘쳤다.
외모의 첫 단계는 뭐니뭐니해도 새로운 도전에서 오는 긴장감과 기대감으로 인한 생기 넘치는 얼굴인 것 같다.
일기장을 폈다. “외모에 신경 쓰는 해” 옆에 천자문 배우는 해 라고 더 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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