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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상자

윤복순/윤약국 약사

서둘러 출근하려는데 책상 위에 하얀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남편의 편지다. 오늘부터 남편은 출장이다. 농업 기술원에서 실시하는 1박2일짜리 교육을 받으러 갔다. 남편이 퇴직하고 난 후 나 혼자서 집을 지키기는 처음이다.

자기 없는 동안 문단속 잘하고 조심하라는 당부와 함께 정감어린 몇 마디가 적혀 있었다. 남편의 조그만 배려가 내 가슴을 찡하게 쳤다.

똑 같은 내용일지라도 글은 말로 하는 것보다 감동이 큰 것 같다. 어떤 이는 이것을 문어체의 특별한 힘이라고 말한다.

연애 시절 남편과 나는 거의 매일 편지를 썼다. 무슨 할 얘기가 그리도 많았을까. 나는 언제나 우체부 아저씨를 기다렸고 편지 쓰는 일 자체가 바로 나의 삶이었다.

남편은 보병학교에서 훈련받던 시절 내 편지가 정신적 지주였다고 한다. 남편 뿐 아니라 같은 내무반원 모두가 편지를 기다렸단다. 어쩌다 내 편지가 없는 날이면 옆 친구가 더 걱정을 했단다.

이튿날 어김없이 어제 것 까지 두통의 편지가 와서 내무반원 모두를 안심 시켰다고 했다.

결혼 후 나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남편은 가끔 편지를 쓴다. 내 생일 땐 장문의 편지를 우편으로 부쳐와 연애 기분으로 나를 띄워주기도 했다. 또 내가 시댁 식구들로 피곤해 하면 “여보 힘들지? 사랑해” 이런 메모를 남겨 내 마음을 녹여 주기도 했다.

이런 남편의 편지를 고맙게 받으면서도 나는 어느새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익숙해졌다. 가끔은 나도 답장을 써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10 여 년 전이다. 모 제약회사에서 “사랑의 편지 쓰기” 행사를 편다는 광고를 접했다. 나는 문득 남편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좀처럼 잘 써지지 않았다.

말로는 잘도 되던 얘기가 편지로 쓰려니 말투가 달라지고 격식을 챙기게 되었다.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몇 번의 중단 끝에 한통의 편지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다. 남편에게는 친필로 제약회사에는 컴퓨터로 뽑아서 보냈다.

편지를 부친 뒤로 나는 매일 남편의 반응을 살폈는데 남편은 통 내색을 안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한 꾸러미의 소포가 배달되었다. 뜯어보니 제약회사에서 보낸 것이었다. 행복상에 당선 됐다는 축하 엽서와 부부 T셔츠 두벌과 당선작들을 묶어 만든 책이 들어 있었다. 남편 눈치만 살피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뜻밖의 반가운 선물이었다.

퇴근하고 온 남편에게 나는 상으로 받은 것들을 내놓으며 자랑을 했다. 남편은 내 편지를 받고 내가 벌써 갱년기가 왔나 걱정이 돼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져 봤단다.

“스물아홉 살에도 갱년기 오나?”

스무 살을 뚝 잘랐다. 남편은 한 술 더 떴다. 나는 대학 4 학년이고 자기는 육군 소위란다. 그때 우리는 무슨 신앙처럼 편지를 썼다.

결혼할 때 나는 혼수는 안중에도 없고 편지만 챙겼었다. 서로 주고받은 편지가 큰 박스에 가득하다. 몇 번의 이사 때에도 제일 먼저 편지 상자를 챙겼었다.

나는 때때로 남편에게 소홀해질 때나 남편한테 서운한 기분이 들 때면 그 편지들을 꺼내 읽어본다. 다시금 애정이 재충전되고 그 만큼 우리를 젊게 하는 그 편지들은 우리 부부의 명실상부한 보물이다.

40여년이 지난 편지들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조상대대로의 가보를 소유하고 있는 것만큼이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비록 어휘력이 뛰어나고 잘 쓰여진 편지는 아닐지라도, 우리 부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어 오랫동안 가슴 떨림을 맛보게도 한다. 삶이 건조하고 심드렁해질 때 꺼내볼 수 있는 보물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백(back ground)을 가진 것처럼 든든하고 자신감 넘치게 한다.

연애시절 주고받은 편지가 우리 부부에게 젊음과 사랑을 다시 확인해 주듯, 같이 살면서 틈틈이 쓰는 편지는 우리의 노년을 더욱 풍요롭고 다감하게 해 줄 것이다. 아름다운 과거를 공유한 부부가 세상에서 제일 부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편지는 혼자서 읽는 호사스런 문학이고, 혼자 듣는 오케스트라의 공연이라고 한다. 모처럼 혼자 보내는 밤에 아침에 남편이 써 놓고 간 쪽지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런 힘이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편지만의 진솔함이 아닐까.

교육을 마치고 돌아올 남편을 위해 나는 맛있는 음식 대신 춘곤기의 비타민 같은 사랑의 편지를 준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