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사람들

겨울 준비

윤복순/윤약국 약사

며칠 전부터 시어머니는 김장 걱정을 하셨다.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올해는 유별하신 것 같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아무 연락도 없이 김장을 척척 해서 보내 주셨다. 지금까지 김치 한번 담아본 적이 없는 나에게 김장 걱정 하시는 것을 보니 시어머니가 갑자기 늙으셨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도 이제 나이가 드셨나 보다며 김장 걱정을 했더니 남편이 휴가를 받았다. 일꾼 열을 얻은 것처럼 마음이 푹 놓였다. 남편이 직접 밭에 가서 배추를 뽑아 왔다. 배추뿐만 아니라 무·파·갓 등등... 친정 동생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하루 종일 걸릴 일감이다.

다음날, 새벽부터 시어머니는 전화를 하셨다. 어제 저녁에 대충 다듬었으니 오늘은 애비 좀 쉬게 하라는 말씀이었다. 배추가 120포기나 되는데 어떻게 다 하셨다는 얘긴지 모르겠다. 거기에 딸린 양념들은 어쩌고. 아들 아끼려는 시어머니의 배려를 어찌 모르랴마는. 시어머니의 아들 아끼는 마음은 특별하다. 아들 얼굴에 주름살 생기는 것이 안타까워 노심초사다. 남편은 뚱뚱한 편이다. 그런데도 “애비는 왜 이렇게 말라 비틀어졌냐?” 하시며 쳐다보고 또 쳐다보신다. 그래서 남편은 어머니한테 갈때는 언제나 면도를 말끔히 하고 로션까지 바르고 간다. 거기다 이발까지 깔끔하게. 그래야 어른들이 걱정을 덜 하시기 때문이다.

아들 얼굴이 괜찮으면 걱정거리는 나에게 온다. “네 얼굴이 부은 것 같다. 피곤한지 주근깨가 더 나온 것 같다” 등등.. 그래서 나도 시댁 갈 때는 안하던 화장을 하고 간다. 일요일에 남편과 내가 등산 다니는 것도 못마땅해 하신다. 애비가 일주일 내내 고생했으니, 집에서 이것저것 맛있는 것 만들어 먹이고 푹 쉬게 하라는 것이다.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말라고 이미 여러 번 지청구를 들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좁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근무를 하기 때문에 일요일에 나가지 않으면 그 다음 일주일이 여간 지루하지 않다. 거기다 오랜 기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일요일에 나가는 것은 거의 자동에 가깝다. 그래서 꾀를 냈다. “어머니, 저도 일요일은 푹 쉬고 싶어요. 그런데 애비가 저를 꼭 끌고 나가내요” “내가 보기엔 네가 나가자고 하는 것 같던데” 남편은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일을 하루 종일 했다. 시어머니와 같이. 쳐다보기도 아까운 아들 고생하는 것을 지켜본 시어머니의 마음이 어떨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드디어 일요일 김장 하는 날이다. 나는 아침부터 서둘렀다. 연 이틀 고생한 아들 때문에 시어머니 심기가 편하지 않을 것은 뻔했다. 그야말로 오늘 하루는 내가 알아서 기어야 한다. 배추 씻는 것은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시누이가 보조자로 들어 왔지만 결국은 내가 보조자가 되고 말았다. 일을 못하는 나는 열심히 해도 남들이 보기엔 어설퍼 보이는 모양이다. 언젠가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남편 사무실에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 끼리 모임을 만들어 매년 모인다. 그중 내가 제일 졸병이다. 콘도로 1박2일 여행을 갔을 때다. 사모님들이 음식을 장만하는데 잘못 손댔다 음식 버릴까봐 “나는 설거지 당번” 했었다. 정작 설거지 할 때도 손이 느려 시간만 끌자 사모님이 “소영이 엄마, 내가 얼른 할께” 하셨다. 염치가 없어 “나는 예쁘니까 가서 마담 노릇이나 해야지” 라고 말해 한바탕 웃었던 적도 있다. 사실은 예쁜 것도 내가 제일 졸병이다.

점심 먹고 김치를 담으면서도 나는 계속 손놀림이 굼떴다. 제사와 설날, 상에 올릴 김치는 시어머니 몫이다. 나는 맛있게 담으려고 배추 잎 사이사이에 속을 박았더니 김치가 뚱보가 되었다. 남편이 김치도 주인 닮아 간다며 내 솜씨를 만천하에 공개해, 나이 값도 못 하는 것 같아 창피했다.

친정 동네에서는 김장철이 되면 온 동네가 젓국 달이는 냄새로 푹 절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품앗이로 함께 모여 담소를 즐기며 공동으로 김장을 담갔다. 저녁때면 집집마다 김치를 한 양푼씩 돌렸다. 어린 우리들이 놀러 가면 노란 배추 속잎을 가려내 깨소금을 듬뿍 무쳐서 주었다. 그 맛이 얼마나 좋았던지.

온가족이 둘러앉아 김장을 했어도 하루 종일 걸렸다. 오늘같이 하루 종일 일하기는 처음이다. 주부클럽에서 소년·소녀 가장에게 김치 담아주는 행사를 할 때, 나도 두어 번 참석한 적이 있다. 약국 비우고 왔다며 잠깐 얼굴만 내미는 식이었다. 그때는 재미있었는데 오늘은 피곤했다. 주부들이 김장 걱정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남편도 피곤한 기색이다. 휴가 받아 김장하는데 꼬박 다 써버려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난 참 복도 많아. 아내 김장하는 것 도와주려고 휴가 받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야’ 아양을 떨었다. 남편은 어머니 걱정과 내 걱정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어서 휴가를 잘 보냈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니 벌써 시어머니의 전화가 기다리고 있다. “오늘 고생 많았다. 어서 쉬어라.” 시어머니 목소리에도 피로가 묻어 있다. 시댁에서 헤어질 때 신신 당부를 하시더니 금시 또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하셨다. 몸살이 나도 당신이 나지 아무렴 젊은 우리가 날까. 나이 들면 걱정 끊일 날이 없다고 하더니 정말 시어머니도 늙으시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