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윤약국 약사

우리 약국에는 우산이 대여섯 개 있다. 사람들이 약 사러 왔다 놓고 간 것들이다. 비오는 날이면 죽 내놓아보지만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우산 뿐만 아니라 애들 노트, 휴대폰, 자동차 키, 지갑, 심지어는 조제한약까지 놓고 가는 사람도 있다. 

휴대폰 지갑 등은 바로 그날 가져가지만, 우산정도는 흔전만전해서인지 알고도 귀찮아서 안 찾아가는지 그 숫자가 더 늘어가는 추세다.

우산이야 한두 개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나도 여러 개 잃어버렸다. 특히 아침에 비가 왔다가 저녁때 개일 때면 거의 놓고 왔던 것 같다.  오죽 했으면 어머니는 우산에다 내 이름을 새겨 주셨을까. 비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우산 잘 챙겨가지고 와라”이렇게 말씀 하셨다. 그런 때는 우산은 잘 가지고 오는 대신 도시락을 놓고 왔다. 정말 못 말리는 건망증이다.

애들이 학교 다닐 때는 급식비 같은 것을 제 날짜에 못 내는 달도 있었다. 독촉장이 와서 보면 정말 안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돈이 없어서 수험료를 납기일 안에 못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때마다 선생님께서 이름을 부르면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이런 경험까지 있는 내가 날짜 하나 딱딱 못 맞췄었다.

남편도 건망증에 관한 한 이등 가라면 서운할 정도다. 실컷 같이 갔다 온 곳도 기억이 없단다.
“당신 애인하고 같이 갔다 와서 나랑 갔다고 착각하는 것 아냐?”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면 그때사 “아~ 거기가 거기야”한다. 이러다가 당신 치매 오는 것 아니냐고 놀려대면, “내 각시가 윤 복순 이라는 것은 절대 안 잊어 버린다” “아무리 건망증이 심하기로 자기 마누라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을까” “걱정 마, 다 잊어버려도 당신만 안 잊어버리면 되잖아.” 싫지 않은 말이다.

며칠 전 TV에서 A산악인이 아들과 히말라야에 오르는 것을 다큐멘터리로 방송했다. 그걸 보면서 또 하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얼굴이며 그 사람이 했던 세세한 일들이 다 생각나는데 이름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며칠 뒤 [산]이라는 프로에 그 산악인이 나왔다.  아! 그래 누구. 그 사람 이름이 떠오르는 대신 A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건 좀 심각한 것 아닐까.

나이 들수록 필요 없는 과거의 정보를 지우는데 더 어려움을 겪고, 이것이 어떤 하나의 사안에 대한 계산이나 이해과정에 사용되는 기억능력(작동기억)에 여러 문제를 일으킨단다. 작동기억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심리적 대청소가 필요하며, 외국어나 악기를 배우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십여 년 전부터 매일 신문에 나오는 영어 한 꼭지씩을 쓰고 외우고 한다. 아침에 공원을 걸으면서 어제 공부한 영어를 떠올려보지만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다.  아, 무정한 건망증.

약국엔 사람들이 올 때 몰려서 온다. 한바탕 정신을 빼놓았다. 누가 놓고 갔는지 시장 봐온 봉투를 놓고 갔다. 두부 도라지 등이다. 저녁 준비를 해야 되니까 금방 찾으러 오겠지.

약국 문을 닫을 때까지 소식이 없다. 누굴까.  젊은 애기 엄마일까, 할머니일까. 우산은 보관이라도 하지만 이것은 어쩐담? 아휴, 다들 정신은 어디다 빼놓고 사는지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