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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예찬

윤복순/윤약국 약사

나는 큰 나무가 우거져 있는 사이로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나무가 풍기는 쌉쌀한 듯 싱그러운 향을 좋아한다.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가지마다 수천(千)의 잎을 겹겹으로 단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뭇잎이 포개진 정도에 따라 초록의 농담이 달라진다. 그 진하고 연한 초록 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간간이 초록의 이파리 끝에 햇살이 반짝거린다. 그 반짝거림도 초록을 닮아 색깔이 있다. 내 눈에는 그 반짝거림이 희망처럼 보이기도 한다. 반짝반짝 끊임없이 내게 보내는 신호는 여유와 위로다. 초록의 농담과 빛의 강약이 섞인 햇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곧추섰던 마음도 가라앉고 어느덧 그윽한 평화로움에 흠씬 젖게 된다.

내가 아침마다 다니는 공원에도 나무가 많다. 요즘은 나무의 밑 둥이 원래의 모습을 잃어 안쓰럽기 짝이 없다. 나무 둥치에 몸을 부딪치면 몸에 좋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웬만한 나무는 하나같이 반질반질 윤이 날 정도다. 사람들에게 부대낀 나무는 그 모진 흔적을 지우지 못한 채 서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나는 대학만은 꼭 서울로 가고 싶었다. 그 꿈을 이루려고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8남매나 되는 형제 때문에 사립대는 감히 엄두도 못 냈다. 국립대에 들어가려고 나는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다. 그렇지만 보기 좋게 낙방하고 말았다.

가정 형편상 재수는 꿈도 꿀 수 없어 울며 겨자 먹기로 지방의 후기 대학에 입학했다. 가고 싶었던 대학이 아니라서인지 막상 대학이란 곳에 들어와 보니 고등학교 때 그렸던 대학과는 너무 달랐다. 이런 대학에 들어오려고 그토록 공부를 열심히 했던가? 나는 억울한 생각만 들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하자고 꾹꾹 참았던 욕구도 다 시들해지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아침이면 학교에 가고 저녁때면 집에 돌아왔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약대 앞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이 일과가 되어 버렸다. ‘학교는 계속 다녀야 하나?’ 하는 물음이 머릿속이고 마음속에 가득했다. 습관처럼 ‘학교를 계속 다녀? 말아?’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중간고사 결과 나는 약용식물학 재시험에 걸리고 말았다. 재시험에 걸린 사람 중 여학생은 나밖에 없었다. 여학생이 몇 명 되지 않는데 좀 창피했다. 공부 때문에 우세당할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 날도 그 벤치는 나를 위해 비어 있었다. 눈을 감고 얼마를 앉아 있었을까!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벤치 옆 큰 플라타너스 나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처음 벤치에 앉아 있을 때부터 쭉 지켜보고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 그 나무의 시선을 받게 되자 나도 그 나무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항상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서 있었지만, 나무를 바라보는 내 기분에 따라 나무의 시선이 조금씩 달라 보였다. 비웃는 듯도 했고, 왜 그러냐고 묻는 듯도 했다. “그래 네 얘기나 한번 들어보자”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서울로 진학한 친구가 대학신문과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또 패배자라는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 친구가 부러웠다. 부러운 만큼 나 자신에게 화가 났고 무기력해졌다. 우울하고 입이 무거워졌다. 나만 퇴보해 가고 있다는 기분을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벤치로 가서 곧장 나의 나무와 눈 맞추기를 시도했다. 나무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가지에 달고 있던 나뭇잎을 한꺼번에 흔들어댔다.‘까르르’ 웃음소리도 들렸다.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햇살도 초록을 묻혀 힘내라고 손뼉을 쳐 주었다. 나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그 뒤부터 나는 나무와 눈 맞추기를 좋아한다. 힘들고 지쳤다고 생각될 때면 산을 찾는다. 나무 사이를 오래 걷다보면 상황이 달라진 게 없는데도 많이 너그러워져 있다.

어느 시인은 ‘봄 나무에 꽃 있네/ 여름 나무에 잎 있네/ 가을 나무에 열매 있네/ 그리고 겨울나무에 위로 있네.’라고 노래했다. 나는 그 위로를 받아 오는 걸까.

나무는 나와 똑같은 눈높이를 가지고 있다. 또 나의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 주는 사랑이 있다. 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넉넉함이 있다. 나는 나무들과 묵언의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이런 큰 나무가 어우러진 샛길을 아무 생각 없이 오래 걷는 것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