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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꽃과 어머니

윤복순/윤약국 약사

나는 들꽃을 좋아한다. 소박하고 순수하며 치장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좋다. 길러주지 않아도 관심주지 않아도 제 때에 제 할 일을 다 하는 그들을 좋아한다. 들꽃은 어떤 악조건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밟히고 밟혀도 다시 일어난다. 나는 뿌리 깊게 박힌 잡초근성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들꽃을 좋아한 것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들풀이나 들꽃이 예뻐지기 시작했다. 자연으로 돌아갈 나이와 가까워지기 때문인 것 같다. 한가하고 조용한 시골길, 누가 봐주지 않아도 들꽃은 때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낸다. 애써 심지 않아도 애지중지 물주고 거름 주지 않아도, 햇빛 하나로 바람 하나로 스스로 살아가는 들꽃이 좋다. 자연에 순응하며 기다릴 줄 아는 그 적응력을 좋아한다.

가을철 들꽃 중 으뜸은 구절초다. 포도밭둑에 구절초 몇 그루가 무리로 꽃을 피운 것을 보았다. 일요일에만 밭에 가고 수확 철이라 이런저런 지인들이 일요일마다 찾아와, 마담 노릇하기도 바빠 밭둑은 보지도 못했다.

구절초에서는 어머니 냄새가 난다. 어느 들꽃인들 어머니를 닮지 않았겠냐마는 구절초는 더욱 그렇다. 친정집 가을마당 한 귀퉁이에는 약국화가 매달려 있었다. 어머니는 구절초를 약국화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밭에 갔다 오는 길에 논에서 오는 길에 몇 개씩 뽑아와 하나하나 엮어 그늘 밑에 걸어 말렸다.

무엇에 좋은 줄도 모르면서 나도 하교 길에 약국화가 있으면 뽑아왔다. 우리 집에선 구절초가 귀한 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가을이면 약국화를 찾아 야산을 헤매고 다니기도 했었다.

구절초의 꽃말이 어머니의 사랑이란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유익해서 이런 꽃말이 생겼을까. 어머니는 가을 일이 끝나면 그늘 밑에서 마른 구절초를 깨끗이 씻어 큰 솥에 끓였다. 그 삶은 물로 식혜를 만드셨다. 구절초의 쓴 맛을 조금이라도 완화시키려 했던 것 같다. 그 식혜는 어머니의 보약이었다가 내 보약이 되었다.

뒷마루에는 언제나 구절초식혜 단지가 있었다. 어머니는 몸이 약한 편이었는데 끼니 때마다 밥보다 식혜를 더 드셨던 것 같다. 구절초는 피를 맑게 하여 혈액순환을 도와주어 몸을 따뜻하게 해 주며, 위장을 편안하고 튼튼하게 해 준다고 한다. 여성들의 부인병에 좋으며 정신적 안정에도 효과가 있단다.

음력 9월 9일에 채취한 것이 약효가 좋다하여 구절초라 했다고 하기도 하고, 한해에 아홉 마디가 자라서 구절초라 했다고 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9월 9일 뿐만 아니라 가을 내내 약국화를 뽑아 모으셨다.

고 3때였을 것이다. 첫차를 타고 학교에 갔다 막차로 집에 오곤 했다. 추위 때문이었는지 대입 공부 때문이었는지 생리통을 아주 심하게 앓았다. 그때 어머니가 해 준 약이 바로 약국화 식혜였다. 결혼할 때까지 겨울마다 그 식혜를 먹었다. 나는 나이에 비해 건강하다. 모두 어머니의 구절초 덕분이다.

언젠가 장미반 백합반 들꽃반으로 나뉜 여고 3학년을 풍자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장미반은 일류 대학 진학반이고, 백합반은 그 다음 순서의 대학에 갈 만한 학생들이 배치되어 있단다. 이 두 반은 학교 측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는다고 한다. 나머지 아이들은 장미반 백합반의 들러리로 학교의 아무런 배려도 없이 들꽃반이 된다는 것이다.

처절 하리 만큼 강한 생명력과 끈기를 가진 들꽃은 모든 조건을 갖춰 재배되는 장미 백합과는 비교 자체가 되지 않는다. 들꽃의 자립심과 잠재력은 인정하지 않은 채 현재의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나는 아이들을 공주 왕자로 키우지 않았다. “너희들은 잡초다. 잡초에 거름 주는 것 보았니?”
어떻게든 자립심을 길러주고 강하게 키우고 싶었다. 남편도 나도 모두 잡초다. 나는 쇠비름이고 남편은 바라구(바랭이의 전라도 사투리)다.

첫 눈에 띄지 않지만 가까이 할수록 아름다움과 기품이 돋보이는 미인처럼, 들꽃도 보면 볼수록 질리지 않고 수더분하게 마음을 사로잡는다. 들꽃반 아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내면과 실력을 찾아낸다면 어느 누가 들꽃이 장미나 백합보다 예쁘지 않거나 소중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들꽃은 화려하지 않으나 결코 천박하지 않다. 돌 틈에서도 큰 나무 뿌리에 눌려서도, 아무런 불평 없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들꽃의 강인함에서 나는 내 어머니를 느낀다.

난지도 쓰레기 산을 죽음이라고 걱정할 때 들꽃의 씨들이 날아와 그 특유의 생명력으로 싹을 틔운 것을 본 적이 있다. 들꽃은 죽음의 땅을 생명의 땅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들꽃의 이런 미덕을 모르는 이들이 자기 멋대로 들이댄 잣대로 장미반과 대비시키는 나뉨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나는 들꽃을 좋아한다. 고향이고 어머니이고 생명 그 자체인 들꽃을 좋아한다. 맑고 단아하고 은은한 들꽃을 좋아한다. 들꽃 같은 여자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