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길/지역농업연구원장

집안이 네 벽뿐이니 세간이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함을 일컫는 말이다.

한서의 사마상여전에 기록된 고사성어다. 사마상여는 중국 전한의 문인인데 시문에 능하였다.
사마상여가 벼슬길에서 물러나 쓰촨성 린충 지역에 있는 왕길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린충 지역의 대 재력가인 탁왕손이 마련한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가게 되었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마상여는 예를 갖추어 거문고를 연주하였다. 거문고 가락이 아름답고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기에 잔치를 베푼 탁왕손의 딸인 탁문군이 사마상여를 흠모하게 이르렀다. 사마상여도 탁문군의 마음을 알아채고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탁왕손은 딸이 사마상여를 사랑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 까닭은 사마상여의 살림살이가 궁벽하기 이를 데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탁문군은 이미 사랑하게 된 사마상여와 헤어질 수 없었다.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탁문군은 사랑하는 사마상여를 따르기로 하고 깊은 밤에 몰래 청두에 있는 사마상여의 집으로 달아났다.

탁문군이 사랑하는 사마상여의 집에 당도해 보니 세간 하나 없는 초라한 집에 사방이 벽뿐이었다. 대 재력가인 아버지를 떠나 사랑하는 사마상여와 함께 달아났으나 기다리는 것은 지독한 가난뿐이었다. 네 벽만 바라보고 굶주려 죽을 수 없기에 사마상여와 결혼한 탁문군은 주막을 차려 생계를 꾸려야 했으니 신세가 고달프기 그지없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던가, 한 무제가 우연한 기회에 사마상여가 지은 자허부를 읽게 되었는데 그 내용에 크게 감동하여 사마상여에게 관직을 하사하였다. 학문에 능하고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덕에 사마상여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이에 장인인 탁왕손과 그 집안도 사마상여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었다.

사마상여가 비록 벼슬길에서 물러나 왕길의 집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가난한 실직자였으나 학문이 깊을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로 볼 때 언제든 또다시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지금은 비록 남의 집에 얹혀사는 불행한 신세지만 시문과 예악에 조예가 깊고, 관직 경험이 있는 사마상여가 중용되리라는 것은 예측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탁왕손은 재력은 있으되 사람을 보는 눈은 그리 좋지 못했던 셈이다. 탁왕손이 사람은 평가하는 기준은 현재의 가치였다. 현 시점에서 돈, 명예, 권력을 얼마나 소유하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사람에 대한 판단 잣대였던 것이다.

어쩌면 곱게 만 자란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실직자인 사마상여에게 딸을 보내지 않으려 했을 수 있다. 이웃 보기에 창피하고 체면이 구겨질 것이 걱정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관직에서 물러난 사마상여가 재직 중에 혹여 잘못한 것이라도 있지 않을까 후과가 두려워서 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집안 어른들의 반대나 부인의 반대가 있었을 수도 있다. 이유가 어떤 것이든 탁왕손의 최종결론은 가난하기 짝이 없는 실직자 사마상여에게 딸을 시집보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딸인 탁문군의 견해는 달랐다. 탁문군의 눈에 비친 사마상여는 비록 현재 남의 사랑방에 얹혀사는 초라한 실직자 신세지만, 언젠가 그 능력을 인정받아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가난과 초라함 뒤에 높은 학문과 깊은 인품이 스며있음을 직시한 셈이었다. 설사 그렇게 보지 못했다 할지라도 탁문군의 눈에 비친 사마상여는 목숨을 걸고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부모님의 사랑과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처지가 딱하기 말할 나위 없는 사마상여와 함께 머나먼 곳으로 야반도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예상이야 했겠지만 목숨을 걸고 도착한 사마상여의 집이란 곳이 살림살이 하나 없는 쓰러져가는 네 벽뿐인 가도사벽이었으니 고대광실 친정집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을 법하다. 친정으로 돌아갈 것인지, 무엇을 할 것인지 낙담과 근심인들 오죽 많았겠는가. 하지만 탁문군은 성실하고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신분도, 체면도 부모님 곁의 호사스러움도 옛일로 접어두고 선술집을 차린 것을 보면 그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었을지 모르나 탁문군의 용기가 가상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현실이 온통 가도사벽이다. 경제는 엉망이고 실업자는 늘어만 가고 있다. 물가는 폭등하고 서민들의 살림살이뿐 아니라 중산층의 생활도 손에 잡히는 게 없는 가도사벽이다. 여름 내내 물폭탄에 농작물은 침수되어 한 해 농사를 망쳤고 장대비에 수도 서울조차 무기력하게 마비되었다. 국민의 세간이 축나 온통 사방이 벽뿐인 가도사벽의 형국이 될 지경이다.

누구를 탓하랴만 내실을 보지 않고 겉모습에 취해 철학이 부재한 대통령을 선택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살펴볼 일이다. 국민과 서민의 삶의 자리에 내려와 진심으로 소통하는 정치인도 많지 않으니, 이 또한 유권자의 각성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세간을 책임질 사람을 뽑는데 껍데기만 보고 선택하고, 겉멋에 취해 소신과 정의를 부르짖는 낮은 자의 친구들을 외면하고, 궂은 일 함께 한 지도자들은 가볍게 여기는 자기모순 앞에서 가도사벽의 형국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꼭 필요한 때 가끔씩 지혜를 발휘하고 현명한 선택을 하는 국민들을 보면, 가도사벽보다 더한 난관도 이겨낼 것이란 희망이 남아 있는 셈이다.

이제는 국민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사마상여의 됨됨이를 알아본 탁문군의 지혜와, 가도사벽의 어려움 속에서도 선술집을 차려 굳센 의지로 난관을 헤쳐 나간 탁문군의 용기를 본받아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