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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

윤복순/윤약국 약사

모 사보의 여름 호에서 모정 문화를 읽었다. 노인들이 모시옷을 입고 부채를 들고 있는 사진이 곁들여져 있다. 아이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눈이 번쩍 띄면서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모정은 여름철에 농사를 짓는 도중 더위를 피하기 위해 짚이나 마른 풀로 지붕을 덮은 작은 정자라고 풀이돼 있다. 우리들은 모종이라고 했다. 전라도 사투리도 아닌 것 같은데 어찌해서 모정이 모종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모정은 특히 전라도 지방에서 발달했었다고 한다.

농경시대 정자가 선비들의 공간이었다면 모정은 서민들의 공간이었다고 한다. 우물터에서 아낙들이 소통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면, 모정은 남성들의 풍류 소통 휴식을 위한 터전이었단다. 우리 동네는 열여섯 가옥으로 조그만 동네였다. 모두 농사를 짓고 살았다.

우리 마을 뒤에도 모정이 있었다. 정자는 없었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사방이 탁 트인 곳 이었다. 한 여름에도 모정에 있으면 더운 줄을 몰랐었다.

여름 방학 때면 동네 조무래기들은 모정에서 놀았다. 땅 따먹기, 숨바꼭질,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남자 여자 편 갈라 놀기, 딱지치기 등등. 남자애들이 언제나 이겼었다. 지고 나면 여자애들은 시비꺼리를 찾곤 했었다. 남자 대장을 골탕 먹일 궁리를 했었다. 대장은 곰보였다. 여자애들은 입을 모아 그를 놀렸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못되었다. 남의 약점을 그리도 놀렸으니 참으로 철없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엔 아무 죄의식도 없었던 것 같다. 그냥 따라 놀렸다. 미안하고 창피하고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어린 날의 과오다.

점심 후에는 어른들의 모정이었다. 아침나절 뙤약볕에서 들일에 지친 어른들이 낮잠을 즐기는 곳이 됐다. 어른들이 일 나갈 때까지는 집에서 놀아야 했다. 우리들은 그 사이도 못 참아서 살금살금 모정으로 갔다. 우리들이 앉아 놀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우리들은 모정 밑으로 들어가 놀았다. 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날벼락이 떨어졌다. 한 아저씨는 정말 사납고 무서웠다. 우리들은 그 아저씨를 풀쐐기라고 불렀다. 우리들은 깜냥에 조용히 한다고 쏙닥쏙닥 얘기를 했었다. 그 아저씨만 우리들 말소리에 잠을 못 자겠다고 했다. 그때 우리들은 무슨 얘깃거리가 그리도 많았는지 모르겠다.

우리들은 일을 꾸몄다. 주위에서 풀줄기를 꺾어 와 뾰족하게 만들어, 그 아저씨 주무시는 마루 틈새로 침을 놓았다. 아저씨는 개미나 물것에 물린 줄 알고 손으로 살짝 때리고는 그냥 잤다. 며칠 동안 재미를 봤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키득키득 웃고 까불다가 들키고 말았다. 일주일 동안 금족령이 내려졌다.

착한 일도 했다. 우리들은 아침 마다 모여 동네 고샅 고샅을 쓸고 풀도 뽑았다. 동네는 깨끗했고 우리들의 싸움질 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모정은 우리들의 놀이터였고, 작전회의 장소였다.

중학교에 다니면서부터 모정에 가지 않았다. 어린 날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면서 갑자기 모정에 가보고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는 친정 동네와 멀어졌다. 동네 앞 친정 산에 부모님 산소가 있다. 산소에 갈 때도 동네에 들러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고향은 고향이 아니다. 지금 그곳엔 친척이나 형제가 아무도 없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찾았던 친정인데, 여자에게 친정은 어머니 살아생전인 것 같다.

내가 친정동네를 멀리한 사이 모정도 이미 생명을 다해 먼지만 쌓여 있었다. 풀쐐기 아저씨의 고함소리도 조무래기들의 싸움판 소리도 아련할 뿐이었다. 반들반들 윤이 나던 마루는 더러는 떨어져 나가고, 걸레질 받아본 적이 언제인지 모르게 까칠하기만 했다. 주위엔 풀이 내 키를 넘게 자라 있다. 시원한 바람은 고사하고 모정 옆에 새로 지은 젖소 막사에서 오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슬펐다. 내가 나이 들어 볼품 없는 것 보다 더 슬펐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잊히는 것이라고 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모정은 잊혀진지 이미 오래였다. 내 어린 시절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선풍기 에어컨에 영화를 다 빼앗기고 제철에도 주인을 잃은 모정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에는 전성기가 있다. 그 시절을 오래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동네 사람들의 더위를 한 방에 날려줬던 그 위풍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모정은 이제는 화보 속에나 들어앉은 뒷방 노인네에 불과한 것일까. 한나절을 앉아 있었지만 끝내 내 어린 시절은 찾을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