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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여행

윤복순/윤약국 약사

중년의 뇌가 더 똑똑하고, 더 침착하고, 더 행복하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뇌는 부정적 자극보다 긍정적 자극에 더 활발하게 작용해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낙관적이고, 안될 일도 되게 한단다.

양구에 다녀왔다. 나는 양구와는 다리 떨리는 인연이 있어 쉽게 다시 가보지 못했었다. 아니 그쪽으로 머리 두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더 솔직한 마음이다.

몇 년 전 사단장으로 있는 남편 친구의 초대로 20여년 만에 양구에 갔었다. 이런 계기가 아니었으면 양구 여행은 시도조차 안했을 것이다. 불과 5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처음 양구에 간 것은 70년대의 끝 무렵이었다. 남편이 그곳에 근무 했었다. 내가 첫 아이를 낳은 해이다. 우리는 주말 아니 월말부부나 되었을 것이다.

대부분 남편이 집으로 내려왔다. 대대장님이 한 달에 한번씩 1박2일짜리 외박을 보내줬었다. 어느 날, 구경삼아 양구에 다녀가지 않겠느냐는 말에 나는 젖먹이를 업고 흥분했었다. 서울에서 1박을 하고, 첫 차를 탔지만 해거름 판에서야 양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양구는 참으로 먼 곳이었다. 비포장도로에 버스도 좋지 않았다.

남편과 상봉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 10.26으로 전군에 비상이 걸렸다. 부대에 들어간 남편은 소식이 없고, 하숙집에서 나는 어린것과 덜덜 떨고 있었다.

3일째 되던 날 나는 남편과 어설프게 작별을 해야만 했다. 그 무서운 곳에 남편을 두고 올 수밖에 없는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얼어붙어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초년병 군인의 아내로서 전방이란 곳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세월이 흐르고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남편은 홍천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 때는 내가 매주 남편을 만나러 가는 상황이었다. 애들을 업고 다녔는데 하루는 나 혼자만 가게 되었다. 모처럼 남편도 시간을 만들어 우리는 춘천에서 배를 타고 양구까지 소양호 유람을 하기로 했다.

육군 소령과 잘 차려입은 여인은 주변의 눈총을 한 몸에 받기에 충분했다. 소양호도 그 만큼 아름다웠다. 가을의 하늘까지 삼위일체를 이루는 하루였다. 모든 것이 우리 부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양구에서 내려 우리는 근사한 식당에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지도 못한 채 튕겨져 나와야만 했다. TV에선 “모든 장병은 빨리 귀대하라”는 자막과 뉴스 속보가 반복되었다. 아웅산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나는 웬만한 사건에는 이골이 난 군인의 아내가 된 줄 알았는데, 또 다리가 후둘 후둘 떨렸다.

점심때가 훨씬 지났는데도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양구에서 홍천까지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다. 남편은 부대로 직행하고, 나는 사색이 되어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일들이 있은 후 나는 의식적으로 양구를 피했을 것이다. 내가 양구에 가면 또 무슨 역사적인 사건이 터질 것만 같아서 말이다.

오랜만에 찾은 양구의 산천은 의구하지 않았다. 그 옛날 하숙집은 찾을 길이 없었다. 먼 곳으로만 알았는데 땅굴이 발견되고,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이 땅굴 구경을 왔다. 북한의 만행을 VTR로 보고, 땅굴 구경을 하는데도 전혀 떨리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긴장하는 기색이 없다.

우리 애들이 어렸을 때 시아버지는 애들을 무릎에 앉히고 TV를 보셨다. 시아버지는 모 정치인만 나오면 “꼴 보기 싫은 놈 나왔다”며 체널을 바꿨었다. 어느 날 식구들이 모여 TV뉴스를 보는데 그 정치인이 나왔다.

“할아버지, 나쁜 놈 나왔는데 돌릴까요?”

그때 아들은 겨우 다섯 살이었다. 나는 세뇌교육, 이념, 사상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해 봤었다.

언제부턴가 북한 괴뢰군이 우리의 동포가 되었다. 남침이나 간첩이란 단어가, 하숙집이 양구 땅에서 없어졌듯 우리 곁에서 없어질 날도 멀지 않은 듯싶다.

지금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금방이라도 멎어 버릴 것 같았던 그 일들을 담담하게 반추하는 여유를 누리고 있다. 평화의 땜에서도, 땅굴에서도, 비목공원에서도, 펀치볼에서도 나는 어떤 불안도 느끼지 못했다. 양구는 더 이상 다리가 떨리는 곳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중년의 뇌 때문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