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사람들

마라톤

윤복순/윤약국 약사

인생은 사랑하는 자의 것이라고 한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삶을 즐기기 위해 가끔씩 이벤트를 준비한다. 남편이나 가족이 챙겨주기 전에 내가 먼저 나를 위해 준비하는 일이 즐겁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그저 들어오는 행복이란 많지 않을 것이다. 똑같은 생활을 운명처럼 견디는 삶은 불행이다. 나는 그 불행을 쫓기 위해 꿈으로 끝나고 말 그 꿈에 날개를 달아본다.

일요일, 미륵산까지 걸어서 다녀오려고 길을 나섰다. 왕복 20Km가 넘는 거리다. 날이 풀려서인지 운동 나온 사람들이 많다. 그들 중 나의 눈을 끄는 것은 단연 마라톤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 이것은 내 꿈 중의 하나다.

2000년 이었을 것이다. 새 천년 새 천년 할 때 이었으니까. 전주~군산 간 벚꽃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내 가슴이 왜 그리 뛰었을까. 꿈에 그리던 일이 내 고장에서 열리다니, 역시 꿈은 이루어지는 것인가.

나는 아침마다 학교 운동장으로 나갔다. 등산이나 걷기는 많이 했지만 달리기는 얼마만인가. 뛰다 걷다 겨우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매일 새벽잠을 설친 결과 열 바퀴까지는 끄떡없다. 맹연습은 계속 되었다.

5Km 건강 달리기에 선수 등록을 마치고, 번호표와 T셔츠를 받아왔을 때의 그 기분이란! 떨리는 손으로 앞뒤 번호표를 달았다.

드디어 그날, 공설운동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또한 패션쇼장을 옮겨 놓은 듯 했다. 가볍게 몸을 풀며 나는 5Km동안 걷는 구간 없이,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꾸준히 달리기로 마음을 정했다.

결승점 100여 미터 앞에서 그만 다리에 힘 쭉 빠졌다. 걷고 싶은 유혹이 굴뚝같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완주는 꿈도 못 꾼다고 생각하니 다시 팔에 힘이 솟았다. 비죽비죽 결승점에 도착했다.“36분” 남편이 크게 외쳤다.‘내년에는 10Km에 도전 해야지’나는 성취감과 자신감에 들떠 나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운동장 주변엔 마라톤 참가자를 위한 먹을거리가 준비 되어 있었다. 모두 공짜였다. 나는 내가 그렇게 얼굴 두꺼운 줄 몰랐다. 한사람이 하나씩만 가져가라고 했는데 내 가방 속엔 생수 초코파이 요구르트가 각각 두개씩 있었다.

나는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실컷 배를 채웠다. 어느새 풀코스 선두 그룹이 들어올 시간이 다 되었다. 메인 스타디움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곧 이어 일등 선수가 들어오고, 장내 아나운서는 시드니 올림픽 티켓이 달려 있다며 카운트다운을 했다. 내가 남을 위해 그날처럼 박수를 친 적이 있었던가. 내 일처럼 흥분했고, 선수 하나 하나를 위해 손바닥이 얼얼할 만큼 박수를 쳤다.

운동장이 허성허성 해지고 잔치는 끝났다. 그래도 나는 운동장을 지켰다. 풀코스에 도전한 남동생이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라톤 시작한지 6시간이 다 되어 갔다. 그때서야 동생이 패잔병처럼 지친 모습으로 들어섰다. 동생은 배가 고파 포기했다가 자원봉사자들의 도시락을 얻어먹고, 정신을 차려 다시 뛰었다고 했다. 내가 너무 많이 먹었을까?

동생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는 경품 추첨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현장에 없는 사람은 재 추첨을 하기 때문에 나는 또 기대에 부풀었다. 동생이 카세트CD 겸용 라디오를 받는 행운을 잡았다. 드디어 최고상인 승용차만 남았다. “만 사천 팔백” 바짝 긴장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내 번호와 똑같이 나갔다. “육십 구” 나는 구십 육 번 이었다.

마라톤이 끝나고 친정 식구들과 저녁 식사를 마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TV뉴스 앞에 앉았다. 야! 또 박수가 터졌다. 스치듯 카메라가 관중석을 잡았는데 나와 남편이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다. 카메라맨은 역시 사람 볼 줄 안다며 나는 가슴을 쭉 폈던 기억이 새롭다.

다음날 약국에 나갔더니 잠깐 스친 화면 속의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4회 대회 때에는 하프코스에 도전했다. 반환점을 돌아서니, 땀 때문에 허벅지고 겨드랑이고 겹치는 부위마다 따가워서 뛸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걷기로 했다. 구급차며 운영차량들이 내 옆으로 다가와 차에 타기를 권유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걸어서 완주했다. 꼴찌를 했다. 자랑스러운 꼴찌다. 나는 기어코 해냈던 것이다.

온 몸이 씻겨 샤워할 때마다 고통을 받았었다. 그 뒤로 마라톤을 하지 않았다. 완주는 가슴에 묻어뒀다. 아직은 쓸 만한 무릎이니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라톤 풀코스 완주에 대한 꿈이 있다. 나는 꿈이 있는 한 걷다 뛰다 할지라도 꼭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오늘 마라톤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니 잠자고 있던 꿈이 꿈틀거린다. 꿈 때문에 스트레스 좀 받을 것 같다. 사람은 몸과 마음이 감당할 수 있는 적절한 긴장이 유지돼야, 몸이 민첩해지고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단다. 마라톤이 나에게 그 정도의 행복한 스트레스일까. 나는 나를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