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사람들 > 비오는 날에

비오는 날에

쏙닥쏙닥 속삭이듯 비가 내린다. 어머니와 조용조용히 정담을 나누듯 내리는 비는 영락없는 봄비다. 봄비로 새싹이 돋아나듯 빗줄기마다 그리움이 돋아난다.

저녁때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엄마들이 애들 학원 차 시간에 맞춰 우산을 들고 나와, 약국 앞에서 서성거린다. 불면 꺼질세라 놓으면 깨질세라 엄마들의 자식사랑은 끝이 없는 것 같다.

어머니도 내가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매일 마중을 나왔었다. 막차를 타고 오는 딸이 행여 밤길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언제나 막차 도착 시간보다 먼저 나와 기다리고 계셨었다.

내가 차에서 내리면 어머니는 제일 먼저 책가방을 받아 들었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것이 무슨 유세나 되는 것처럼, 나는 어머니가 마중 나오는 것도 책가방을 들어주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당시 시내버스는 고장이 잦고 연착도 잘했다. 이런 날이면 어머니는 허허벌판에서 1시간도 더 기다려야만 했다. 집까지는 정류장에서 20여분 걸어서 들어간다. 매일 마중 나와 책가방을 들고 가는 어머니를 보며 동네 사람들은 누가 학생인지 모르겠다고 수근 거렸었다.

나는 약국 문을 닫고 집에 들어가면 아무 일도 하기 싫다. 다시 집 밖으로 볼 일을 보러 나오기는 더더욱 싫다.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하루 종일 농사 일로 종종거렸을 텐데 얼마나 피곤하셨을까.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쉬고 싶었을 것이다.

특히 겨울에는 저녁 식사 후 한참이 지나야 열시 반이 된다. 시골에서 그 시간은 한 밤중이다. 그 시간에 딸 마중을 위해 나와야만 했다. 동지섣달 추위에 정말 나오기 싫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이 없었다. “춥지? 배고프지 않냐?” 오히려 나를 걱정해 줬었다.

나도 엄마가 되어 마중을 나간 적이 있다.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아들 학교는 한 울타리 안에 여중, 여고, 남자 중학교, 남자고등학교가 같이 있다. 어느 건물이 남고인지 몰라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명색이 우산 가지고 마중을 나왔는데 교실은 고사하고 학교도 모르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우두커니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꿈결인 듯 “너도 마중 나왔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어머니 하면 내 마중 생각이 제일 앞선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 다닐 때도 마중을 나왔었다. 해 떨어질 때까지 집에 도착하지 않으면 정류장에서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었다. 그때 여대생은 동네에서 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수업이 끝나기 조금 전부터 비가 내렸다. 학교 앞에 사는 친구들은 어머니가 우산을 들고 마중을 나왔다. 나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항상 그랬었다. 농촌에선 비오는 날이 더 바쁘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에서 같이 다니는 학생들이 많아 비를 맞고 뛰어가거나 논고랑에서 물장난을 하며 뭉쳐 다녔었다. 그 당시 비를 맞고 집에 돌아오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 날은 왜 그랬을까. 괜히 심통이 났다. 어머니가 우산을 가지고 올 때까지 집에 가지 않겠다며 교실에서 버텼다. 식식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어두워졌다. 무섬증이 확 들었다.

독하게 맘먹고 동네까지 뛰어왔다. 초등학교는 걸어서 40분 거리다. 우리 집 대문 앞에 이르자 참았던 분함이 한꺼번에 터져 엉엉 울었다.

“바빠 죽겠는데 왜 너까지 속썩이냐” 저녁 준비를 하던 어머니가 부엌에서 뛰어나와 나를 끌어안았다. 어머니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 있었던 것 같았다. 참으로 철없던 생떼였다.

아들은 그날 엄마가 마중을 나왔다고 무척 좋아했었다. 아들과 같이 했던 늦은 귀가길, 나도 가슴 뿌듯했던 기억이 새롭다. 어머니도 딸과 같이 했던 매일 밤이 나만큼 행복했었을까.

돌이켜보니 그때 아들 마중을 자청하고 나선 일은 아주 잘 한 것 같다. 그 당시 애들 마중은 시아버지 몫이었는데, 어머니 생각을 하며 차를 두고 아들 학교까지 걸어서 갔었다. 끝나는 시간보다 일찍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늘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언제 학원 차가 도착했는지 기다리던 엄마들은 보이지 않는다. 봄비 속엔 흑백사진 같은 그리움이 있다. 고단한 삶속에서도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나만의 색깔로 채색된 추억을 기억할 수 있음이 아닐까.

소록소록 내리는 비 때문인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더 크게 느껴지는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