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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정의

원광대학교 경찰행정학부 교수, 법학박사 / 장규원

정의의 이름으로…

법은 왜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법은 무엇인가 이념과 가치라는 것을 꾀하기 위해 존재한다.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공공복리라고도 한다.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어느 한 면만 보고 하나의 가치만을 강조한 듯한 인상을 떨칠 수 없다. 군맹평상(群盲評象). 장님 코끼리 만지기다.

내용이 없는 법은 없다. 그러나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반드시 정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독일의 법학자 구스타프 라드브루흐(Gustav Radbruch)는 법은 곧 정의의 실현이라고 한다. 아울러 합목적성과 법적 안정성을 추구한다고 하여 일컬어 법이념의 세 가지 요소를 이야기하였다. 오늘날 통설적으로 받아들이는 주장이다.

그래 많은 사람들이 법과 정의를 같이 놓고 이야기 하지만, 우리네 입장에서 법과 정의의 연계는 왠지 서먹하다. 오히려 정의라고 하기보다는 의(義)나 의리(義理)라는 말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을까싶다. 법치주의보다는 덕(德)을 중히 여겨 법규범보다는 도덕규범이 더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나 싶다. 공자와 맹자 시절부터 전해져오는 말이다. “남의 어려움을 이용해먹으려는 놈들의 욕심이 도를 넘었다.” 이 말은 곧 도덕적으로 너무했다는 평가가 아니겠는가. 인의예지를 으뜸으로 꼽은 것이다. 여기서 인(仁)은 사람들 사이의 사랑을 뜻하는 좀 더 보편적인 덕목이요, 의(義)는 사회적인 맥락에서 올바름을 뜻하는 것이라 새길 수 있다.

서구 사회에서 정의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그리스에서는 법(dike)과 정의(dikaiosyne)는 언어적으로 같은 뿌리다. 디케는 정의라고 부르는 질서 또는 원리라는 의미로, 디카이오쉬네는 보통 윤리적 덕의 하나로 받아들였다. 디케는 또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이다. 오른 손에 칼을 왼손에 저울을 가진 눈을 가린 여신으로, 정의의 여신이다. 왼손의 저울을 들고 있는 것은 정의의 엄정한 기준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오른 손의 칼은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는 힘이 요구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눈을 가렸다는 것의 의미는 정의는 사리사욕에 흔들리지 않고 공평무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억울한 경우를 당하기도 하고 남이 당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목격하면서 사람은 억울해서 울분을 토한다. 그래야 할 정당한 근거도 없이, 그래야 할 당연한 이유도 없이 부당한 피해를 받는다면 그 얼마나 억울한가. 단순한 울분을 넘어 정의에 바탕을 둔 분노일 경우 이를 의분(義憤)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정의의 또 다른 의미를 새길 수 있다.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는 것은 곧 정의로운 대응을 했다는 것이다.

법의 이름으로…

각자의 생각이 다르고, 그에 따라 구체적 이해관계가 다르고 각자 자신의 이익을 더 꾀하려 하기 때문에 시시비비가 끊이질 않는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공정한 입장에 서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수 있을까.

살아가는데 있어서 지켜야 할 것들이 필요하지만, 만약 법이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짓누른다면 그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종종 어떤 규제나 법은 사람들의 생활을 제법 조여 댄다. 어찌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은 인권이니, 기본권이니 하는 거창한 개념이나 법률보다는 집 앞 구멍가계의 생필품 값에 더 민감하다. 그럼에도 서민의 실생활과 직결된 여러 규제가 일부 행정 편의나 정치인들의 무관심 속에서 서민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쏟아지기도 한다. 처벌의 강도는 날로 강화되는데 그 강화되어야 하는 객관적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은 범죄를 줄일 수 있다는 이유로 덮어져야 하는 경우도 있다. 다수를 위해서는 소수는 무시될 수 있다는 단순한 공리주의적 생각이 해답인양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는 갑돌이가 어디를 가고 갑순이가 어제 저녁 무엇을 했는지, 그 모든 것이 기록되고 저장되고, 누군가에 의해 관찰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범인 검거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일상적인 감시에 대한 동의서를 얻은 것이 아님에도 거리마다 CCTV로 가득하다. 그로 인해 우리들은 잠재적 범죄자로 대접받아야 하지만 도시는 그 자체로 또 다른 환경이 되어버렸다. CCTV 아래를 용케 피해 지나가도 신용카드와 휴대전화, 내지는 인터넷을 다루는 과정에서 갑돌이와 갑순이의 행적은 낱낱이 드러난다. 누구든 빅브라더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파놉티콘에 갇힌 꼴이다.

보이기 싫을 때도 있고, 들키고 싶지 않을 때도 있고, 감출 수도 있어야 한다. 초상권이요, 기본권이요, 인권이요라고 떠들 수도 없다. 왜? 범인 검거에 공을 세우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범인 검거와 범죄 예방을 늘 같다고 할 수 없다.

신문기사 내용을 정리하여 다른 나라의 경우를 예로 보자. “… 말하는 감시 카메라를 도입했다. 폐쇄 회로 모니터를 통해 적발된 한 사람에게 스피커는 경고 메시지를 전한다. ‘아저씨! 담배꽁초 다시 주우세요.’ 깜짝 놀란 그 사람은 허공에서 울려 퍼지는 꾸지람에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다. 사실 아무리 감시 카메라를 돌려도 사소한 위법 행위나 무질서는 단속하기 어렵다. 그만큼 감시 카메라에 사람들이 익숙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설마 이것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랴!’ 하는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무질서 행위를 저지르는 순간, 당신이 하는 일을 우리는 보고 있다. 당신을 처벌하겠다는 경고 메시지를 듣게 되면 누구라도 하던 짓을 멈출 수밖에 없다.”

CCTV가 범죄와의 전쟁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변하고 있지만 실제 범죄 예방 효과는 거의 없고 사생활만 침해할 뿐이라는 주장도 무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의는 자유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행복의 극대화라는 공리주의 사고만큼이나 익숙하다. 정의는 보편적 인권이라는 생각이다. 법의 집행은 정의에 바탕을 둬야 탈이 없다. 사회 정의가 수 만대의 감시 카메라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래도 다시 정의의 이름으로…

일을 해결하고자 할 때 모든 사람의 이해득실을 따져 판단의 기초로 한다는 것은 매우 상식적이고 실제적인 사고의 틀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틀은 상이한 각 개인의 득과 실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따질 것인가라는 문제와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합리화한다는 단점이 있다. 개인의 자유를 존중해 각자 좋은 삶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정의에 대한 논의는 자유로부터 시작하여야 하는가? 그러나 ‘무엇이 좋은 삶이냐’에 대한 대답을 괄호로 묶어 놓은 채, 모든 사람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정의는 또한 막연하다.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합리화하는 존재일 뿐이다. 행복을 극대화하려다 보면 개인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고,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다 보면 공동체의 미덕이 훼손될 수 있다. 제로섬 게임 같은 판에서 어떤 근거로 합리화를 꾀할 것인가.

법이 꾀해야 하는 정의란 단순한 보편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이념에 따라 정의가 달라진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숱하게 살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법의 끊임없는 요구다. “실정법은 정의에 우선한다. 다만 실정법과 정의가 도저히 허용할 수 없는 정도로 모순될 때는, 정의가 우선한다.” 소위 라드부르흐 공식이라는 것이다.

정의 실현을 꾀하지 않는 실정법이나 국가는 단순한 실력이나 폭력의 조직화이지 법치국가가 아니다. “세상이 아무리 떠들어도 정의는 행해져야 한다.” 법철학 문헌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구다.

그러면…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의일까?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 정의일까? 아니면 공동선을 장려하고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정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