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학박사

김성중

봄의 전령 벚꽃과 개나리가 만발했던 모습이 추억이 되고, 이제는 비를 그리워하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어김없이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바로, 멋진 벗과 함께 잘 빚은 술을 안주 삼아 한적한 대화로 취하고 싶습니다. 때마침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의 「술을 마주하며(對酒)」의 시구가 입가에 맴돕니다.

와우각상쟁하사(蝸牛角上爭何事),
석화광중기차신(石火光中寄此身).
수부수빈차환락(隨富隨貧且歡樂).
불개구소시치인(不開口笑是痴人).

달팽이 뿔 위에서 무얼 그리 싸우는가
부싯돌 불빛처럼 짧은 인생을 살면서
부유한 대로 가난한 대로 즐겁게 살아가세
하하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로세.

예나 지금이나 술이 우리네 삶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최근에는 소주와 맥주가 대중적이지만, 이 계절에는 지역의 땀과 혼이 깃든 가양주, 다시 말해 집에서 담근 술이 그립습니다. 맥주나 소주가 양적으로나 판매액으로나 최고이지만 맥주는 엄밀히 보면 수입 주류에 해당하고, 소주는 대부분 희석식 주류라 진정한 의미의 양조 과정을 거친 술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다행히 우리 익산에도 전통주인 ‘호산춘’이 있다고 하여 맛볼 요량으로 인터넷 주문을 시도했더니, 웬걸... 경북 문경 ‘호산춘’이 간판으로 뜹니다.

내막을 알고 보니, 문경에 살고있는 황희 정승의 후손들이 문중의 가양주로 ‘호산춘’을 빚고 있었습니다. 장수 황씨 22대 종손인 황규욱 씨는 “증조할머니, 고조할머니도 가양주를 담근 사실이 확실하니 호산춘의 역사는 최소 200년은 넘는다"고 자부하며 판매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 익산에서 유래한 호산춘이 문경에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호산춘(壺山春)은 익산지방을 대표하는 명주입니다. 호산은 여산면 천호산으로부터 따온 명칭입니다. 춘(春)의 의미를 살펴보면. 발효시켜 1차로 걸러낸 술이 주(酒)이며, 이 주를 한번 더 덧술해 순후한 맛을 내게 한 술을 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두를 한번 더 덧술해 맑고 그윽한 맛을 내개 한 술을 주(酎)라고 하는데, 이 주(酎)를 고상한 표현으로 춘주(春酒)라 한 데서 춘(春)이 술의 특품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유래해 서울의 약산춘, 평양의 벽향춘, 여산의 호산춘 등 춘(春)자 붙은 술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태어난 ‘여산 호산춘’은 2013년에 열린 ‘한국 궁중 술빚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심사위원들한테서 “맛과 향이 빼어나다.”라는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가양주임에도 불구하고 알코올 도수가 18%까지 올라갔다.”라는 점을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이 술은 2018년 3월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여산 호산춘’은 이병기 가문의 전통 가양주입니다. 이병기의 25대 조부인 이현려는 고려 시대인 1156년부터 1203년까지 왕의 검식관인 지다방사(知茶房事)를 지냈는데, 그 당시부터 제조 방법이 개발되어 전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이병기 가문에서 여산 호산춘을 빚는 방법을 보유하고 있는 이는 이연호씨입니다. 이병기 선생님의 조카인 이연호씨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여산 호산춘의 제조 방법을 전수 받았다고 합니다. 여산 호산춘은 『임원십육지』, 『산림경제』에 제조 방법 등에 관한 기록들이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도 옛 제조 방식을 잃지 않고 전승되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습니다.

최고의 식품은 집에서 정성을 다해 만들어 먹는 음식입니다. 외식 산업의 성공 비결은 집 밖에서도 마치 집밥과 같이 먹을 수 있도록 맛과 질을 갖추는 데 있습니다. 전통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주의 근원인 가양주처럼 집에서 손수 만든 술이야말로 집밥과 마찬가지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술입니다.

오늘날 집에서 직접 술을 담글 형편은 못 된다면, '전통주에 대한 양조 체험'을 확산해서 잃어버린 가양주 문화를 살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양주 문화의 회복이 시장에서 전통주에 대한 관심과 가치를 높이는 밑거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익산의 전통주 ‘여산 호산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합니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꼭 ‘여산 호산춘’을 한번 맛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