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사람들 > 문화라는 이름의 밥상

문화라는 이름의 밥상

하인애

어릴 적에 나는 무척이나 서양의 문물을 좋아했었다. 주말이 되면 TV에서 나오는 외국 영화가 보고 싶어서 언니 오빠들과 채널을 다투기도 했고 학교 공부보다 외국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 그 시절의 어린 나에게는 삶의 윤활유와도 같았다.

우리 집은 종가집이라서 엄마는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만 며느리 대접을 받을 수가 있었다. 결국 딸을 줄줄이 넷을 낳고 난 후에 엄마는 그리도 원했던 아들 둘을 얻게 되었다. 그제야 제대로 종가집 며느리로서의 책임감을 면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엄마 뱃속에 들어앉아서 어쩌면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사라질 뻔했던 딸아이가 다시 태어났고 그 아이는 자라면서 어딘가가 항상 아픈 몸으로 살아야만 했다. 내가 서양의 문물을 그리도 탐닉했던 이유는 이런 현실의 고통을 잠시라도 잊게 해주는 마음의 유일한 안식처였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일 년이면 거의 매 달 돌아오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뼈마디가 쑤시도록 일해야 했고 어린 나는 그런 엄마의 삶을 지켜보면서 우리의 유교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반감을 품으면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시절의 며느리들의 시집살이는 다 그렇듯이 마음속에는 멍이 든 채로 살면서도 겉으로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래서 결국 엄마는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지나간 아픈 삶의 기억으로 인해 그리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있지 못해서 막내딸의 마음은 늘 짠하기만 하다. 이렇듯 자라 온 환경 속에서 스펀지처럼 자연스럽게 흡수된 우리 문화에 대한 생각은 반세기를 살아온 나의 머릿속을 온전히 지배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가까스로 운이 좋아서 삶을 조금이나마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여러 방편들을 찾다보니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그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 품고 있던 우리의 문화에 대한 편견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아득한 고대로부터 하늘을 공경해서 제천의식을 거행해왔고 농사를 지으면서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풍습은 우리의 상고사에도 기록이 되어 있다. 우리가 역사 시간에 배웠던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이 그 좋은 예이다. 그 후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적 관습이 일반화 되면서 조상에게 제사를 모시는 것은 후손된 도리로 당연한 삶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조상을 기리는 것은 결코 사라져야 할 풍습도 아니고 서양의 문화에 비해 뒤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나는 문화를 편식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전통에 대한 반감과 그와는 반대로 서양의 문물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판세가 완전히 뒤바뀌어 오히려 서양에서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을 오는 학생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들이 한국으로 오고 싶어 하는 이유는 아마도 한류의 영향이 클 것으로 보이지만 내 생각엔 한류를 가능케 한 우리 민족의 저력이 그 어느 민족에게도 처지지 않는 내공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문화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한 민족의 시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았을 때 진정으로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나의 밥상 위에 문화라는 이름의 음식들이 잘 차려진 채로 내 앞에 있다고 가정을 해 본다면, 나는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어느 나라의 문화는 뒤떨어지고 미개하다든가 또 어느 나라의 문화는 세련되고 성숙하다든가 이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면 이제 그만 그 생각을 내려놓고 다양한 맛을 가진 문화를 골고루 섭취해야 한다. 그랬을 때 우리의 뇌는 유연해지고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살아갈 것이다.

다만, 지나친 형식과 관습에 얽매여서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구시대적 낡은 관습은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아직도 상다리가 부러지고 며느리의 허리가 휘는 일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아름다운 미풍양속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의 삶을 저해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천손문화를 미래의 후손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전해주어야 할 것인가를 제대로 연구하고 공부해서 장차 이 나라를 미래에 지구를 선도하는 국가로 만들기 위해 초석을 다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