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학박사 김 성 중

스마트폰이 2년쯤 지나면 묘하게도 느려지거나 고장을 일으킵니다. 더 쓸 수 있을 것 같은 가전제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문제가 생깁니다. 간단한 부품만 있으면 고칠 수 있을 텐데 제조회사는 부품 구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부품을 바꾸고 고치는 것보다 새로 사는 게 더 저렴하니 그렇게 하라고 권유를 합니다.

하드웨어 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더 큰 메모리와 더 빠른 프로세서가 필요하도록 프로그램을 과장하라'는 것이 개발자의 슬로건이라고 합니다. 새 제품을 사서 이용하지 않으면 뭔가 뒤떨어진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광고 또한 계획적 진부화를 부추깁니다.

‘계획적 진부화’란 새로운 품종의 판매를 위하여 옛날 품종을 의도적으로 진부화시키는 기업행동을 말합니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계획적 진부화 중에서 전구 제조업체의 카르텔 담합이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1881년 에디슨이 처음 만든 전구의 수명은 1500시간이었고 1920년대 생산된 전구의 평균 수명은 2500시간이었습니다. 1924년 12월 전구 수명을 결정하는 회의가 열렸고 전구의 수명을 1000시간 이하로 제한하자는 목표가 정해졌습니다. 제품 수명이 기업의 수익과 직결되기 때문에 벌어진 계획적 진부화입니다.

유럽환경국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EU의 모든 스마트폰의 수명을 1년 연장하면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매년 210만톤까지 감소시키고, 스마트폰과 노트북, 세탁기, 진공청소기 등의 수명을 5년 연장하면 2030년까지 매년 거의 1,000만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1년 동안 자동차 500만대를 도로에서 없애는 효과와 같다고 하니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자명합니다. 계획적 진부화에 저항합니다.

첫째, 핵과학자 협회지 '불리틴'은 2023년 1월, 지구종말 시계가 2020년 1월 이래 10초가량 당겨진 90초 남았다고 밝혔습니다. 지구종말 시계가 등장한 것은 핵폭탄이 이유였지만, 지금은 핵과 함께 지구온난화, 초미세먼지, 바이러스, 기상이변,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까지 고려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계획적 진부화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평균 18개월 정도 사용되고 버려지는 휴대 전화의 경우에 비소, 안티몬, 베릴륨, 카드뮴, 납, 니켈, 아연 등 생물체에 유해한 독소를 포함한 쓰레기 더미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들을 소각한다는 것은 다이옥신과 푸란 등 오염물질을 대기 중으로 뿜어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2015년 7월부터 프랑스에서는 계획적 진부화를 유도하는 기업에 대하여 최고 2년의 실형 또는 30만 유로의 벌금을 부과합니다. 계획적 진부화를 예방하기 위한 노력은 프랑스 정부의 정책과 법률 제정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다양한 시민단체의 움직임과 대중의 인식 변화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HOP라는 프랑스의 사회단체는 프랑스 내 계획적 진부화가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시민에게 계획적 진부화를 알리고 대안을 찾는 대표적인 곳입니다.

셋째, 탄소중립을 위한 ‘수리할 권리(right to repair)’가 미국과 EU을 중심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EU는 2020년 3월에 수리할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였고, 미국은 2022년 7월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이 담긴 행정명령을 발동했습니다.

그 내용은 일정 기간 부품 단종을 금지하고, 동네 수리센터를 통한 수리를 허가하여 소비자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자원 절약을 통하여 탄소중립 정책에 기여하자는 취지입니다.

호킹 박사는 인류가 멸종하지 않으려면 100년 안에 지구를 떠나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을 영위하려면 다양한 생물들과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마스크를 쓸 게 아니라 숲을 살려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계획적 진부화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지구종말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 위한 정책과 법률 제정을 서둘러야 하며 수리할 권리를 찾기 위한 시민운동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지구종말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다분히 상징적입니다. 의지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거꾸로 돌릴 수 있습니다. 선택은 늘 인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내일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더 절실히 와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