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경허란 스님이 계셨다.

스님은 힘이 장사이신데도 어느 갯마을에서 유부녀를 희롱하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게 되었다. 두들겨 맞으면서도 도망가지 않았다.

또 언젠가는 절집에서 문둥이하고 한 방에서 같이 사셨다. 고름이 나는 여자 문둥이하고 안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팔을 베고 다리를 척 올리고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시기도 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존경스러운 분이다. 아마 그 여자 문둥이는 다음 세상에서 경허스님 뒤를 따라다니며 은혜를 갚았을 것이다.

'백척간두진일보' 백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말이다. 하지만 백척간두에만 주저 앉으면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고, 착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게 된다. 범부도 성인도 아닌 자리에 멍하니 있기만 하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작용을 나타내야 한다. 헛것인 이 모습을 나타내서 춤도 춰 보고 술도 먹어보는 갖가지 인생놀이를 해보는 것, 이것이 진일보하는 게 아닐까. 아침에 꽃이 피고 저녁에 떨어지는 등의 작용을 나타내봐야 하지 않을까. 이처럼 모습을 나투는 작용을 하면서 그 처해 있는 자리, 비어 있는 자리를 놓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선사들은 술집이나 저잣거리에서 어울리면서도 그 당처를 놓치지 않고 공부를 했다. 한 방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