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숲교회 담임목사

강남웅

제1차 세계대전이 치열하게 진행 중이던 때, 영국, 프랑스, 독일 군사들 간에는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서부전선의 플랑드르 지역에서도 영국·프랑스군과 독일군이 불과 100m도 안 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 중이었습니다. 벨기에의 <이프르>도 그러한 전선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의 참호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주시하며 시야에 들어오는 대로 총을 쏘아 쓰러뜨렸고, 야간에는 적의 참호로 침투하여 백병전으로 서로를 죽이는 일을 반복하였습니다. 오죽하면 이곳을 죽음의 땅(No man’s land)이라고 했을까요!

전선은 치열했지만 지루함이 계속됩니다. 양측의 군대 모두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거의 전진을 하지 못하고, 참호를 깊게 파고 들어가 대치하는 상태를 보인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포근함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는 전쟁터였습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한 공포와 함께 향수에 빠져 참호 속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19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전방 독일군 측 진영에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독일군이 방벽 위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엔 독일군 쪽에서 한 병사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Silent Night, Holy Night)을 부르기 시작하자 다른 독일군 병사들도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까? 처음에는 나지막한 음성이었지만, 이내 노래는 파도처럼 전장 곳곳으로 퍼져나가 수천 명의 사나이가 좌우에서 합창하는 듯 메아리로 울려 퍼졌습니다. 이 노래를 듣던 영국군 쪽에서는 가지고 있던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노래가 끝나자 영국군 쪽에서 박수 소리와 함께 “잘했다, 제군. 앙코르, 앙코르, 좀 더 부탁해!”라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갈채를 받은 독일군 병사들은 “메리 크리스마스, 영국사람들! 우리는 쏘지 않을 테니 너희도 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양초를 세워 불을 붙인 트리를 든 독일군 병사가 참호 밖으로 걸어 나왔고, 누구도 그를 쏘지 못했습니다. 오래지 않아 총을 내려놓은 병사들은 장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인지대로 우르르 몰려 나가 서로에게 악수하며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담배와 통조림)을 나누고, 고이 간직한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서로를 위로하였습니다.

이에 양측 지휘관들은 시체 수습을 위해 잠시간의 휴전을 결의했습니다. 적개심을 버린 병사들은 총을 버리고 야전삽을 들고나와서 전사자들의 시신을 거두고, 무덤을 만들고 그 무덤 위에 십자가를 세웠습니다. 무덤 주위에 열을 지어 서서 영국의 애덤스 군목의 집례로 합동 장례식을 거행하며 전사한 젊은 영혼들의 명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시체가 말끔히 치워진 무인 지대에서 병사들은 편을 나누어 축구 경기를 벌였고, 경기 후에는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며, 정보들을 교환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을 경우를 위해 주소를 교환하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영국군 소총 여단을 지휘하던 월터 컨그리브 장군은 편지로 이날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나는 놀라운 상황을 발견했다. 오늘 아침 한 독일인이 자신들은 하루짜리 휴전을 원하고 있다고 외쳤다. 그래서 우리 병사 가운데 한 명이 매우 조심스럽게 난간 위로 올라섰고 한 독일인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봤다."라고 적었습니다. 특히 "곧이어 양측에서 더 많이 밖으로 나섰고 결국 온종일 그 특별한 장소에서 그들은 함께 산책하며 서로에게 담배를 주며 노래를 불렀다"라고 밝혔습니다. 또 당시 한 병사는 부모에게 이러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봤습니다. 살인과 죽음 속에도 인간다움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제게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가 되었습니다"라고 전했습니다. 크리스마스트리와 캐럴이 가져온 믿기지 않는 ‘전투의 멈춤’은 빠르게 번져 나갔고 일부 전선에서는 새해 벽두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휴전에 참여한 군인들은 양국에서 10만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람들은 훗날 이것을 '크리스마스 휴전(Christmas Truce)'으로 부르며 전 세계 곳곳에 감동과 희망의 이야기로 전했습니다. 이 기적과 같은 이야기는 2005년 영화 '메리 크리스마스(Joyeux Noel, Merry Christmas)'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영국의 ‘데일리 미러’신문은 양국 군이 이때 찍은 사진으로 1면을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상부 지휘관들의 철저한 개입으로 인해 다시 참호에서 대치하는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은 850만 명의 사망자를 냈고, 사망자의 두 배 이상이 부상을 입게 됩니다.

크리스마스 휴전 이야기를 통해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통해서 이 땅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보았고, 미움과 증오는 인간과 세계를 불행하게 하고, 결국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사랑만이 인간과 세계를 구원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다시금 작은 평화가 우리 삶의 현장에서 큰 싸움을 멈추는 성탄 절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