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면장

채수훈

명문가란 사회적 신분과 지위가 높고, 학술과 덕망을 지닌 집안 또는 가문을 일컫는다. 그 조건은 어느 시기 특정한 인물만 배출한 것이 아닌 대를 이어 꾸준히 인물을 길러낸 문중이라 하겠다. 익산의 대표적인 명문가는 여산 여산송씨, 왕궁 진주소씨, 진천송씨가 있다. 왕궁 두 가문의 대표적 인물에는 양곡 소세양(1486～1562년)과 표옹 송영구(1556～1620년)를 꼽을 수 있다. 시대적으로는 조선 초?중기 때 살다 갔고, 양곡이 표옹보다 70년 앞섰다. 두 분의 삶의 발자취와 집안 이력을 살펴보면 전국 명문가이자 교육 가문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두 가문의 고택은 안타깝게도 사라졌지만 재실, 묘소 및 문화재가 있어서 그 자취를 엿볼 수 있었다. 이들 세거지는 호남의 관문 격인 왕궁의 국도 1호와 삼남대로 변에 있다. 풍수적으로 볼 때 양택과 음택 터가 양수겸장이라 할 수 있다.

지난 12월 초에 왕궁면 공공기관장들이 두 가문의 문화탐방을 했다. 향토사를 알아야 면내 공공기관장 한다. 먼저 배워야 설명을 할 수 있다. 시베리아의 찬 공기가 기습하여 날씨가 추워지자 옷차림도 두터워졌다. 왕궁 출신 임홍락 익산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께서 해설을 맡아 주었다.

첫 번째 답사지로 호남 최고 명당마을인 장중의 표옹 송영구의 망모당, 신비한 은행나무와 마당바위를 찾았다. 특히 망모당 현판과 우산정사 묏자리에 얽힌 표옹과 명나라 대문장가 주지번의 국경을 초월한 4백여 년이 넘는 아름다운 인연, 진천송씨가 우주황씨와 삭령최씨가 혼인하며 크게 발복한 이야기는 한 가문에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엿볼 수 있었다.

장중에서 4km 떨어져 있는 우리나라 10대 명당 터인 표옹 재실 우산정사, 용솔, 삼정승 소나무 그리고 신도비를 둘러보았다. 풍수가들이 소리소문없이 자주 찾는 곳이라 한다. 부족한 부분은 문중회장께서 보완 설명해주었다. 선산 주변에 조선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옛말에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하지만 이 묘터에는 낙락장송이 수호신처럼 선산을 호위하고 있다. 버스가 떠나기 전, 우산정사 앞 연못에서 손수 재배한 백련 차와 백련 국수를 선물로 주었다. 백련은 표옹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직접 가져와서 심었다고 전한다.

두 번째 답사지 진주소씨 세거지인 신탄마을로 향했다. 용화산 기슭의 양지바른 능선에 자리한 익산 최초 금석문인 소자파묘비와 익산 유일 소세양신도비까지 묘비에 얽힌 글씨, 재질, 조각 등을 시대별로 다양하게 훑어보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양곡과 황진이의 순애보도 극적이었다. 소세양이 황진이와 30일만 지내기로 한 약정 일에, 황진이가 이별 시 한 수를 올리자 읊고 탄식하며“내가 (떠나면) 사람이 아니지!”하고는 다시 머물렀다. 이제 세월이 흘러 소세양의 묘소에 누군가 찾아오면 이 고장의 역사, 문화, 인물의 속살에 숨겨져 있는 옛이야기에 흠뻑 빠진다면 하루 걸음으로 왕궁을 쉽게 떠나지는 못할 것이다.

선산 밑에는 도순저수지가 푸른 하늘과 같은 색으로 닮아있다. 그 너머 왕궁평야와 안산인 모악산이 선명하여 손에 잡힐 듯하다. 좌청룡 우백호의 능선이 포근하게 감싸 안고 찬 바람을 막아주었다. 해가 따뜻하게 내리쬐어 명당 터임을 몸이 반응으로 응답하고 있었다. 사후에도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선산 끝자락에 작은 산소들이 산재하였는데 아마도 명당의 정기를 이어받고자 한 흔적이지 않을까 싶다.

조선시대 뼈대 있는 가문은 뭔가 다르고 본받을 것이 많다. 그 숭고한 정신이 면면이 자자손손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왕궁은 자랑할 인물이 쌍벽을 이루고 있어서 참으로 축복받은 고장임이 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하고 뻔하다.

점심 식사는 기관장들이 한눈팔지 않고 답사에 몰두하느라 오후 1시가 다 돼서 하게 되었다. 이번 왕궁 명문가 답사는 기관장들의 첫 방문이었다. 일부 찾아갔는데 자세한 해설을 들을 수 없어서 아쉬워했었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전해 주는 옛날이야기처럼 구수한 해설과 현장감이 넘치는 답사로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리는 것 같다고 했다. 우리 향토사가 막걸리처럼 토속미가 있으며 감칠맛 나는 것 같다. 골동품이 된 등잔의 밑이 어두운 법이다.

원점인 면 소재지로 돌아오는 길에 이구동성으로 뜻있고 알찬 송년회가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 여세를 몰아서 지역단체와 협력하여 어린이에서 어른까지 ‘왕궁 문화탐방 프로그램' 운영에 본격 시동을 걸어볼까 한다. 조선 어느 문인은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했다. 역시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