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약국 안 만큼 밖도 한가하다. 코로나19로 많은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하기 때문이다. 나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어쩌다 오는 사람들도 마스크만 찾는다. 원하는 것이 없어 대부분 그냥 나간다. 언제 들어 오냐고 묻는데 기약이 없다고 대답한다.

어지간한 모임들은 취소되고 동네 이웃끼리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 먹는 소소한 일상도 다 생략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약국이 동네 사랑방 노릇을 하는데 지금은 이야기꾼들도 잠깐 눈만 맞춘다. 조그만 것이라도 내게 주고 싶어 매일 오시는 할머니도 나오시지 않는다.

이렇게 내 시간이 많아졌다. 이런 때 책이나 읽어야겠다. 연초에 동생이 오면서 대여섯 권 가지고 왔고 딸도 가지고 왔다. 책 부자가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서점에 가지 않은 지 오래다. 책 고를지도 모른다. 딸이 읽은 책을 내가 읽는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먼저 골랐다. 오랜만에 읽는 장편소설이다. 재미있어서 진도가 팍팍 나간다. 약국이 한가해도 지루하지 않았다. 책을 쌓아놓고 이번 참에 다 읽을 생각에 신이 났다.

그것도 잠깐이지 3주가 지나니 책 읽는 것도 시들해졌다. 바쁜 중에 잠깐잠깐 짬을 내 책 읽을 때는 아무것도 안하고 책만 읽는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상 그런 시간이 되니 잡생각만 나고, 여행가고 싶고, 집중력이 떨어져 재미있게 읽혀지지 않는다. ‘마음 챙김’이니 ‘뇌 휴식’이니 등은 읽은 줄을 또 읽고 있다.

코로나19만 아니었으면 지금 네팔에 있을 텐데. 내가 가기로 했던 여행상품을 찾아 일정표를 읽어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그러다가 오늘도 확진자가 몇 명이나 더 나왔나 인터넷을 기웃거린다. 시간이 널널하니 마음까지 해이해지고 코로나19로 뒤숭숭하니 영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언젠가 모임 회장이 제일 한가한 사람에게 총무를 시켰는데, 눈코 뜰 쌔 없이 바쁜 사람이 하는 게 더 낫더라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역시 능력이 있으니까 바쁘다.

책 읽는 것도 의욕이나 흥미가 떨어져 시시해졌다. 전화 걸어 수다나 떨까. 용건 없이 그럴 만만한 사람도 없다. 신문을 뒤적이다 ‘책이 친구인 이유’ 꼭지에 눈이 꽂혔다.

친구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우애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익으로 매개되는 친구다. 서로 유익함을 주고받으면서 유지되는 친구다. 윈-윈 하는 괜찮은 관계이지 않을까. 두 번째는 즐거움 덕분에 유지되는 친구다. 진정 귀한 친구는 이 부류에 속할 것이다. 세 번째 친구는 훌륭함 또는 탁월함 때문에 만나게 되는 친구다. 부러울 정도로 참 좋아 나무랄 곳이 없는 인격의 소유자인 그를 자주 만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우애를 다지고 싶어 하는 경우다.

불행스럽게도 나에겐 세 번째의 친구는 없다. 가까이 그런 친구가 있어 닮으려 노력하며 사는 삶은 행복할 텐데. 하기야 그런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가 어디 하나 본받고 싶은 구석이 없는 나와 쉽게 친구가 되어 주겠는가. 아름답게 살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아름답게 사는 친구만큼 귀한 선물은 없을 것이다. 오래전 첫 시집을 낼 때 책 제목이 ‘아름답게 살자하여서’ 이었는데.

책이 세 가지 의미에서 친구다. 책은 항상 유익하다. 필요한 정보와 의미를 준다. 책을 읽는 것은 큰 기쁨이다. 재미있어 밤을 새워가며 읽은 책이 어디 한두 권이던가. 그보다 책을 읽으며 나를 돌아보고,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고 다짐도 하고, 모르는 것을 알아가고. 이만하면 유익하고 즐겁고 훌륭한 친구가 맞다.

하루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안경에 김도 서리고 입에서 냄새도 나는 것 같다. 껌을 씹어본다. 책을 읽는 동안은 안경을 벗는다. 그래도 입김이 위로 올라 눈이 갑갑하다. 입 주변이 트는지 저녁에 들어가 세수하고 콜드크림을 바르면 살짝 쓰리다. 마스크 고무줄 때문에 귀가 아프다. 어찌 얼굴은 넓어가지고. 언제쯤 끝날까. 잘 이겨낼 것이라 믿으며 견디고 있다.

동네 아주머니가 종일 집에 있다 갑갑해서 나왔단다. 동사무소에서 하는 요가도 문을 닫고 막 재미를 알아가는 오카리나도 쉬니 사는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요가가 끝나면 어울려 점심을 먹고 차도 한잔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간다. 여럿이 먹으니 밥도 맛있다. 혼자 밥 먹고 말할 사람도 없고, 언제 끝날지 오래가면 무기력증에 걸리겠단다.

약국도 안전지대가 아니니 나오시라고 하지 못했다. 대신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드렸다. “아이고 눈 빠져서 책은 못 봐.” “그러면 아무거나 쓰고 싶은 대로 써 보실래요.” 익산수필을 드렸다.

다시 혼자 있는 시간이다. 책이랑 친구나 해야겠다. 부러울 정도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우리와 친구를 해 주니 않으니 우리가 책을 많이 읽어 훌륭해지자고 작가는 결론을 맺는다.

심기일전해 책을 읽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빡빡해진다. 잠시 눈을 감는다. 다시 책을 읽는다. 글이 어리어리하게 보인다. 마치 눈을 반쯤 감고 보는 것 같다. 마스크를 벗어 볼까. 그건 안 되는데.

시간이 많으면 책을 잘 읽을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뭐든지 바쁜 중에 잠깐잠깐 짬 내어 할 때가 맛이 있는 법이다. 빨리 코로나19가 진정되어 거리에 활력이 넘쳤으면 좋겠다. 약국도 다시 사랑방이 되고, 눈 피로감 없이 모자란 시간에 집중력 좋게 책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