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문화원 고문
김 복 현

농촌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황금물결에 마음이 넉넉할지 몰라도 우리 삶의 뿌리인 농촌의 분위기는 마냥 즐거운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한 톨의 쌀이라도 더 거두기 위해 지난여름 농민들이 흘린 땀방울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쌀의 귀중함을 언제부터인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쌀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귀하디귀한 우리의 재산이요, 식량이었다.

그래서 한 때는 절미(節米)운동도 했다. 어머니들은 밥을 지을 때 식구 한 명당 쌀 한 숟가락을 덜어 모아가면서 삶의 지혜를 담아내기도 했다. 음식점과 숙박업소에서는 무미일(無米日)이 지정돼 일주일에 두 번은 쌀이 들어간 음식을 팔지 못하게 했던 시절도 있었다. 학교에선 선생님이 도시락 뚜껑을 열어젖히고 혼식검사를 한 적도 있었다. 쌀은 우리민족에게는 목숨과 같았던 것이었으며 지금도 소중하게 아끼고 있다. 한때 쌀을 사는 것을 ‘쌀을 판다’고 했다. 쌀이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기에 집안에 쌀이 떨어졌다는 말을 꺼내면 집안을 돌보아주는 조상들의 영혼이 화를 낸다고 믿어 쌀이 떨어져 쌀을 사러가야 할 상황에서도 쌀을 사러간다는 말을 하지 않고 쌀이 남아서 팔러간다는 표현을 쓰도록 했다는 이야기이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며 살았던 우리의 서러움과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양식을 사러가면서도 팔러가는 척 했던 것이다. 쌀을 사러가면서도 왜 쌀을 팔러간다고 하게 됐는지 정확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기록은 없다. 근래 쌀 인심이 후해졌다. 공깃밥 1,000원이란 가격표가 붙어 있는 식당도 있지만 대부분의 식당이 밥은 그냥 더 드시라고 한다. 적당히 퍼 담은 밥을 그나마 남기는 손님이 대다수다.

어르신들은 여전히 밥 힘으로 산다고 하지만 젊은이들은 밥보다 빵을 좋아하고 고기를 좋아한다. 쌀 소비가 갈수록 줄고 있다. 쌀이 부족하여 못 먹던 시절에도 1인당 쌀 소비량은 연간 130kg나 되었다. 그런 쌀이 지금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지난해 1인당 쌀 소비량은 하루 평균 169.9g으로 하루 두공기도 안 먹는다는 것이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61.9kg으로 20년 전인 1996년(104.9kg)에 비해 절반수준이다. 그런데도 생산량은 소비량보다 훨씬 많아 처치 곤란이다. 지난해 쌀 생산량은 420만t으로 적정 생산량 390만t을 크게 웃돌고 있다. 20년 전 532만t에 비해 100만t정도 줄었다. 작년 쌀값은 80kg 한가마당 12만 9711원으로 20년 전인 1996년 13만6,713원보다 낮다. 화폐가치로 따지면 쌀값은 반 토막이 됐다. 반면 자장면 값은 20년 전 2,500원에서 5,000원으로 배가 오른 것과 대조적이다. 그러하니 쌀 정책은 한마디로 고육지책이다. 쌀이 남는데도 정부가 시세보다 비싼 값을 주고 사주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데도 지금 농민들은 쌀농사 대신 다른 작물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그러하니 과잉생산의 악순환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쌀 생산을 줄이고 영농을 다각화하는 농정 개혁이야말로 시급한 과제인 것을 지도자들은 알면서도 그냥 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농촌경제 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1인당 쌀 소비량 전망치는 역대 최저인 59.6kg이다 하루소비량으로 환산하면 163g 으로 밥 한 공기에 쌀 120g들어가니 하루에 겨우 한 공기 남짓 먹는 셈이다. 먹을거리가 넘쳐 쌀이 홀대 받지만 농정실패로 생산량은 거의 그대로이다. 정부는 올해도 양곡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우리사회의 단면을 소개하면 농산물의 황제였던 쌀이 돼지에게 왕좌자리를 넘겨 줄 것이라고 한다. 돼지 생산액은 6조 7,700억 원 (도축기준 88만 2,000t)인데 쌀 생산액은 6조 4,500억 원(420만t)에 머물러 사상처음으로 생산액 순위가 바뀔 것이라는 전망이다. 농촌 경제 연구원은 1인당 돼지고기 소비량이 연간 23.3kg으로 급증하고 가격이 올라 쌀값 추월이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분석한 자료를 내놓고 있다. 돼지고기는 전체 소비량의 25%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위안이 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세계 식량 원조협약(FAC)에 곧 가입해 연간 5만t의 쌀을 해외원조에 사용하게 될 것이라는 소식이다.

찬밥 신세가 된 쌀이 기아에 허덕이는 이들의 따뜻한 밥이 됐으면 좋겠다. 수확기를 맞는 들녘의 벼도 반길 것이다.

가을의 상징인 들판의 황금빛물결도 이제는 즐겨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으며 우리민족의 애환이 담겨있는 쌀의 소중함을 알았으면 하는 생각이 감도는 것을 어찌할 것인가? 금년에는 태풍도 없었으니 들녘의 황금물결은 더욱 그 빛이 찬란하다. 그런데 걱정이다. 남아도는 쌀로 인하여 그 가격이 땀방울에 보답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대대손손 지켜온 농촌의 모습은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다. 이참에 우리민족의 뿌리인 농촌을 생각해보면서 뿌리가 사라지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 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