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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어른

▲ 김성중 前 익산경찰서장

전 익산경찰서장

김성중

중학교 3학년 담임이셨던 고석민 선생님께서 2000년도에 정년 퇴임을 하시면서 교단생활을 정리하시며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저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하여 어렵게 그 책을 구하여 읽었습니다. 카리스마가 넘쳤던 선생님 생전의 모습이 새삼 떠오르며, ‘선생님께서 제자를 위하여 많은 생각을 하고 계셨구나’라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유고집이 된 <교단별곡> 중에 ‘진학지도’라는 제하의 글을 일부 소개합니다.

80년대 초에 중학교 3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는데 여러 학생 중에서 특히 K군이 새삼스레 생각나 몇 자 적어본다. K군은 심성이 착하고 체격도 당당하였으며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은근히 사랑스러웠다. 어느 날 K군과 진학지도 상담을 하게 되었다.

고향은 성당면이며 창인동에서 할머니하고 생활하고 있는데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하기에 기계공고로 진학하여 3년 후에는 부모님을 도와드리겠다는 것이었다.

가정 형편상 인문계 고등학교에 무리가 될 수 있겠지만 진학하면 새로운 진로가 열릴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실력과 체력 모든 것을 겸비하였기에 내 뜻을 따라 진학하라고 종용하였더니 소리 없이 따라 주었다. 그 후 K군은 N고등학교로 진학하여 운동장에서 가끔 만나 인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심히 지나쳤었다.

어느 해 여름방학 전, 제복을 입은 학생이 내 앞에 나타나 거수경례를 하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 K군이었다. 휴게실로 인도하여 얘기를 듣게 되었는데 N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찰대학에 진학하여 현재 2학년에 재학 중인데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선생님께 인사드리려고 왔다고 하는 것이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선생이란 제자가 찾아와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뿌듯하고 백만 대군이나 얻은 장군처럼 의기양양하여 큰 보람을 느끼는 것이다.

1993년 대전 엑스포가 열렸을 때 조직위원회 과장으로 근무한다면서 고등학교 B 선생이 안부를 전했다. 바쁜 일과 중에도 B 선생과 담소할 수 있었는데 중학교 3학년 담임이던 고 선생님의 진학지도 배려로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기에 선생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말만 들어도 흐뭇하고 괜스레 신나서 하루가 즐거웠다.

-교단별곡 中에서 발췌-

비록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은사님이 한 분 계셨다는 사실이 행복합니다. 참고서 살 돈이 없어 헌책방을 드나들던 저에게 대학 진학에 대한 꿈은 그저 희망 고문일 뿐이었습니다. 차라리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남들보다 빨리 취업을 해서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 싶어 선생님께 실업계 진학을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하셨던 것입니다.

당시 집에서도 실업계로 진학해서 집안에 보탬이 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신 터라 집에 이야기하는 게 어려웠지만, 선생님의 말씀이라 넌지시 말씀드렸더니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 부모님의 의견을 다시 말씀드리니 선생님은 또 저를 설득하시며 이번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학업에 재능이 있고 문과 체질인데 공고에 진학하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하라.”시며 완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아버지를 모셔온 연후에 원서를 써주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찾아가 다시 말씀드리니 결국에는 포기하고 허락하셨습니다.

가정형편으로 인문계에 가지 못한다는 것이 내심 아쉬웠던 터라 선생님의 설득과 아버지의 허락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 학비와 교재비를 걱정해야 할 처지이긴 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은 다시 기회를 잡는 기쁜 일이었습니다. 저에겐 담임선생님이 바로 새로운 기회를 주신 어른이십니다. 그때 그 선생님의 설득이 없었다면, 그저 나의 진학이 선생님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면 ‘내 인생은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중요한 대목입니다.

지금도 교육현장에서 제자들의 미래를 걱정하시며 노력하고 계시는 선생님들의 노고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선생님의 글을 대하니 이토록 저를 사랑스럽게 여기고 계셨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이 아니었다면 제가 원하는 삶을 제대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주변의 관심과 조언이 필요한 시기가 바로 청소년 시기임을 잘 알고 있는 이유는 모두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의 청소년들은 한정된 정보와 짧은 인생 경험에 비추어 새로운 선택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시기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른들의 욕심을 따라 아이들의 미래를 강요해서는 안 되지만, 기회가 있다면 아이들의 적성과 미래를 고려하여 앞길을 밝혀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변 아이들에게 더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지금은 세대교체의 시기입니다. 이제 하나둘 낡은 구습 정치가 더는 통하지 않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미래의 주역인 다음 세대를 위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물려주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어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