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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시대 경제성장, 사회정의에 달려있다

익산시민 유 성 무

지금까지 살면서 경제가 좋다는 말을 들어본 적도 별로 없었지만, 요즘 피부로 느끼는 경기가 상당히 좋지 않다. 대기업부터 골목의 자영업자들까지 모두들 그 어느 때보다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끄는 신기술을 중심으로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할 거라는 수년 전의 전망이 무색한 지경이다.

인류가 200여 년 동안 겪었던 3번의 산업혁명을 분석한 자료들에 의하면, 기계화가 시작된 1차 산업혁명기 동안에만 경제가 급격하게 성장했다고 한다. 증기기관을 필두로 한 기계의 등장 이전에 대부분 국가에서는 노동력에 의존한 농업 및 수공업이 산업의 주류를 이뤘다. 기계의 등장은 식민지 및 약소국들에 대한 수탈을 연료 삼아 강국들을 중심으로 오랫동안 경제성장을 안겨줬다.

그런데 석유와 전기 등 새로운 에너지를 축으로 대량생산체제가 구축된 2차 산업혁명기에는 1차 산업혁명 때 보였던 경제성장이 나타나지 않았다. 엄청난 기술적 진보와 획기적 발명 속에서도 눈에 띄는 생산성 향상이 없었다. 오히려 2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는 국제정세의 격동기 속에서 대공황 같은 글로벌 경제 재앙과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이 등장했다.

1970년대 정보기술의 등장으로 3차 산업혁명의 화려한 장이 열렸다. 그러나 이 또한 뚜렷한 경제성장 성적표를 내진 못했다. 다만 1990년대 초에 인터넷의 상업적 이용이 합법화된 이래 산업 및 시장의 개념을 크게 바꾸는 계기를 만들었다.

연구에 따르면, 2차 및 3차 산업혁명의 성과는 대체로 수십 년이 지난 후에 나타났다고 한다. 기술적 진보에 의한 경제성장이 지체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지적된다. 새로운 기술이 경제 전반에 파급돼 성과를 나타내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며, 그 과정에서 각종 이해관계의 충돌로 경제성장을 저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 동안 소위 ‘대번영기’를 누렸던 미국을 살펴보자. 유럽 및 아시아 주요 지역이 폐허가 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세계적으로 벌어진 복구사업 및 자유무역 사조로 글로벌 경제가 활성화됐다. 따라서 본국의 피해가 없는 상태에서 이를 주도한 패권국가 미국이 최대 수혜국이 됐고, 때마침 2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기술들이 결실을 맺어 경제성장을 이끌었기 때문에 대번영기가 가능했을까?

이런 이유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1944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발표한 ‘제2권리장전(The Second Bill of Rights)’의 정신이 대번영기의 초석을 놓았다고 생각한다. 제2권리장전의 골자는 ‘고용 안정 및 적정 임금 보장, 적절한 의식주 향유에 대한 권리 보장, 기업의 공정경쟁 보장 및 독점기업의 폐해 척결, 적정 수준의 의료 서비스 보장,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 보장 등’이다. 이후 미국은 20여 년 동안 소득세 최고 세율 90%선을 유지하고 루스벨트가 천명한 사회보장을 안착시키면서 민생안정과 2차 산업혁명의 개화를 통한 경제성장의 선순환을 이뤄냈다.

사회정의가 경제번영을 이뤘는지, 아니면 경제번영이 사회정의의 기틀을 마련했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하지만 자본주의 천국 미국에서 사회정의가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을 위한 필요조건임을 인식하고 상당기간 실천한 것만은 분명하다. 물론 노동권 강화와 정부 규제, 높은 세율 때문에 197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저하됐다는 지적도 있으나, 이는 산업의 구조적 변화 및 기업의 글로벌 전략 측면에서 봐야 할 부분이다.

1차·2차 산업혁명은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소비시장의 규모를 확대했지만, 3차 산업혁명은 ‘고용 없는 성장’이란 인류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현상을 보여줬다. 생력화를 통해 기업의 생산성 자체는 향상되는데, 이를 뒷받침해 줄 시장의 소비여력은 생산성을 따라가지 못하고 부의 편중을 심화시켰다. 기술 및 경영 혁신으로 재화와 서비스는 넘쳐나는데 이를 사 줄 시장이 함께 커지지 못하니, 경제성장이 쉽지 않은 역설적 상황에 빠졌다는 말이다.

문제는 3차 산업혁명의 파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래한 4차 산업혁명의 파괴력이다. AI를 중심으로 온갖 기술들이 융복합 되면서 업(業)의 개념과 경계가 무너지고 있고, 영세사업자들까지 참여할 수밖에 없는 플랫폼 경제생태계가 구축되면서 업계 빅3 정도만 살아남는 무한경쟁시대에 들어섰다. ‘고용 없는 성장’을 넘어서 ‘고용 없는 혼돈’의 대처방법을 고민해야 할 이유다.

최근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소득주도성장을 아우르는 포용적 성장론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일고 있다.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는 말처럼 대다수 서민들이 당장 먹고 사는 문제처럼 중요한 게 없기에, 장기간 단계적으로 사회구조를 바꿔야 하는 포용적 성장론에 대한 비판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힘들다고 작금의 기술 및 국제질서 격동기에 대한 근본적 대처법을 외면한다면, 경제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릴 것이다.

이미 10년째 우리나라의 GDP 실질성장률이 2~3%선에서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1%대로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인구구조와 산업의 본질이 바뀌는 세상에서 과거처럼 생산이 주도하는 고성장 시대는 끝났다고 보인다. 경제를 살릴 방법은 4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사회정의로 연결하려는 범국민적 합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