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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

윤복순 윤약국약사

출근하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익산역에 가방이 도착했으니 찾아가라는 것이다. 어제 밤 집에 와서야 배낭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부터 잘못일까. 용산역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놓고 왔을까, 열차 안에, 택시에다?

큰 가방 정리할 생각도 없이 하나 하나 기억을 되살려 본다. 식당에선 나오면서 의자까지 식탁 밑에 잘 밀어 넣고 나왔다. 기차에선 선반에 남편 것은 올릴 수 없어 내 캐리어만 올렸다. 올릴 때 보니 검정 가방이 있었던 것 같다. 택시에선 캐리어 두 개를 앞좌석에 놓고 우리는 뒷좌석에 앉자 배낭을 벗은 기억이 없다.

익산역에 전화를 했다. 용산 출발 여수엑스포행 KTX OOO호 열차 6호차 2A 2B 선반 위에 가방을 놓고 내렸다고 하니, 중요한 물건이 있냐고 묻는다. 기차 안에서 살짝 잠이 들었던 것이 원인이다. 요즘은 서울에서 익산까지 1시간 남짓 걸린다.

배낭 안에는 여행 시 필요한 약과 간식거리가 들어있다. 그것은 내가 산 것도 아니고 아파트 재활용 박스 위에서 주운 것이다. 거기다 값나가는 것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어서 크게 애석할 것은 없다.

나는 내 물건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그래서 그 물건이 다 낡아 못쓰게 될 때까지 쓴다. 어렸을 때 여러 형제들 속에서 어려운 시기를 살아 몸에 밴 절약정신 때문이기도 하지만, 딱히 유행을 따르거나 꼭 가지고 싶은 것도 없어 한 번 내 손에 들어오면 끝까지 사용한다.

아침 운동을 나가면서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려 하니 재활용품 박스 위에 아직은 충분히 쓸 만한 배낭이 있었다. 책가방 비슷한 것인데 검정색으로 청색 지퍼가 옆에 있어 윗부분을 열지 않아도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윗부분도 한 번 접어 붙이게 되어 있어 멋도 있고 단순한 게 딱 내 취향이다.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쓸 만한 것은 재활용 박스 속에 넣지 않고 위에 올려놓는다. 그래서 안 본 책도 갖다 읽었고, 신발도 주워 밭에 일하러 갈 때 잘 신고 다닌다. 배낭을 가져와 빨아보니 깨끗하게 빨아서 내 놓아 내가 빨 것이 없다.

내겐 이 배낭 말고 또 하나가 있다. 그것은 작은 언니가 준 것이다. 십 여 년 전 정년퇴직 후 산에만 다니는 언니에게 안 쓰는 배낭이 있으면 하나 달라고 하니, 당신 며느리가 외국 여행 갔다 오면서 면세점에서 사다준 것이라고 한다. 서로 배낭 매고 부닥칠 일 없으니 잘 쓰라고 했다.

여성 전용이다. 외국 여행시 잘 가지고 다닌다. 일단 가볍고 수납도 많아 물, 바람막이 점퍼, 버스 안에서 먹을 간식거리, 썬블럭, 양산 겸 우산, 수첩 등등을 넣어 다닌다.

그런데 끈이 어깨 밑으로 흘러내릴 때가 있다. 특히 옷의 소재가 미끄러운 것일 때 그렇다. 손수건으로 어깨끈을 묶고 다닐 때도 있다. 가끔은 바랑이 무거울 때도 있는데 남편이 여자 것이라고 나를 도와주려 하지 않는다. 약간 작다는 느낌도 있다.

이런 참에 배낭을 주은 것이다. 아직은 성성해서 횡재한 기분이었다. 남녀 공용이라 남편이 매어도 된다. 이런 보물을 기차에 두고 내렸는데 다행히 역무원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익산역에 돌아왔다는 전갈이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가 익산역에 서울 갈 차표를 사러 간다면서 배낭을 찾아다 주겠다고 한다. 나도 인터넷으로 기차표 예매 같은 것은 할 줄 몰라 도와 줄 수가 없고, 오히려 도움만 받았다.

이번 일본 홋카이도 여행에서, 노보리베츠에서 칼무덤이란 것을 보았다. 무덤 형태가 아니고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무라이들이 자기가 쓰던 칼을 묻은 곳일까 내 마음대로 상상을 했다. 물론 칼을 직접 묻는 곳은 아니다.

일본 사람들은 칼 하나를 만들어도 대를 이어 만들고, 제대로 만들어 한 번 만든 것은 10년이고 20년이고 다 닳아 못 쓰게 될 때까지 쓴다고 한다. 더 이상 못 쓰게 됐을 때 주변에 있는 칼무덤에 가지고 가서, 너랑 같이 하는 동안 행복했다, 이런 저런 추억들이 있지 하며 칼에 대한 감사와 애도의 시간을 가진 뒤 버린다고 한다.

삿포로에는 백 년이 넘은 건물들이 많이 있다. 그 건물들이 주변의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혀 오래된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현재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서 대를 이어 가업을 이어간다.

젊은 날 무엇이든 아끼고 유행이 지난 구식의 내 용품을 보고 내 삶을 궁상맞고 근천을 떤다고 했다. 타고난 천성이 멋과는 거리가 멀고 하루 종일 약국에만 있으니 새로운 물건 살 줄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내가 뭐 그리 잘났다고 이것저것 사면서 지구를 오염시킬까 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잠깐 마음이 흔들린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지금까지 내 것의 물건을 가치 있게 여기고 아끼며 의미를 부여하고 쓰레기가 생기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다.

언니가 준 것과 주운 배낭이면 내 생전에 충분할 것이다. 일본 여행을 다녀온 뒤 하찮은 물건 하나도 귀하게 여기며 검소하게 살아온 삶이 그래도 괜찮게 살았다는 믿음을 굳힌다. 이제는 나이도 먹었으니 최소한의 생활을 하도록 더 마음 잡도리 잘 해야겠다.

배낭 안에 있는 것들을 내놓고 다음여행을 위해 잘 접어 제자리에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