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 사람들

김치 사치

윤약국약사

윤복순

북한 주부가 나와 김장을 백포기 넘게 했다고 선전하는 것을 보았다. 포기 수로 부를 과시하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도 많이 했었는데 언제부턴가 조금씩 하더니 요즘은 아예 안하기도 한다. 우리는 오히려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서 김치가 아니라도 먹을 것이 많으니 조금씩 하게 된 것 같다.
나도 시어머니가 살림하실 때는 김치가 흔전만전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얻어먹는 신세다. 그러다 보니 김치를 아껴 먹는다. 뿐만 아니라 햇김치를 좋아하는데 담글 줄을 몰라 김장때까지 묵은 김치만 먹고 산다. 이런 내 처지를 아는 올케가 가끔 담가줄 때도 있지만.
작년에도 사돈댁에서 두 통, 포도농사 짓는 아저씨가 두 통, 일 도와주러 오는 후배가 한 통, 밭일하러 오는 아주머니가 한 통 주었다. 동네 사람들이 김장했다고 몇 포기씩 준 것까지 합쳐 버티고 있다.
남편은 김치를 좋아한다. 나는 요리를 못하니 만만한 게 김치찌개다. 찌개 한 번 하고 나면 김치가 푹푹 줄어든다. 통장에 잔고가 줄어드는 것만큼 신경이 쓰인다. 현재 김치냉장고에는 한 통밖에 남지 않았다. 김치는 손이 많이 갈 뿐 아니라 담가보지 않아 엄두도 못 낸다.
시아버지 제사다. 올해는 일요일이어서 전만 반찬가게에 맡기고 내가 해보기로 했다. 딸도 며느리도 오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다. 대신 토요일 아침운동도 못가고 청소를 했다. 나는 손끝이 야무지지 못해 일이 서툴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죽자사자 했는데 다 끝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침식사도 못하고 출근을 했다.
살림을 못하지만 일이 무섭지는 않다. 그리고 꾀를 부리지도 않는다. 내 나름으로는 머리를 쓰고 즐기면서 하는 편이다. 결과물이 형편없어서 체면이 서지 않아 문제다. 최선을 다해 노래 불러도 음치는 음치이듯.
일요일 시금치, 도라지, 고사리나물 만들고 탕 한가지 하고 나니 오전 시간이 다 갔다. 열 세 명이나 되는 식구 점심 준비하고 먹고 나니 2시다. 적도 만들고 생선도 쪄야 하는데. 아들네가 9시 열차를 탄다고 하니 6시부터는 제사를 지내야 할 것 같다. 손은 느리고 마음만 바쁘다.
딸이 김치꼬지를 뀌자고 한다. 결혼해서 제 남편에게 해줬더니 이렇게 맛있는 것 첨 먹어본다고 하더란다. 앞으로는 종종 먹을 수 있겠지 했는데 애기를 다섯 명이나 낳아 키우느라 통 안 해주니까 사기결혼 한 것 같다고 했다며 오늘 하자고 한다.
김치 세 쪽을 내오니 푹 줄었다. 돼지고기 한 조각 김치 한 조각을 뀌는데 딸이 김치가 맛있다며 넓은 잎사귀를 돌돌 말아 한 번에 뀐다. “야, 김치 한 통밖에 안 남았어.” “엄마 오늘 김치 사치 한 번 해보게.” 다시 두 쪽을 더 잘라왔다.
돼지고기에 마늘과 간장을 넣어 조물조물 해둔다. 그래야 고기에 양념과 간이 배어 맛이 있다. 꼬지를 만들어 찜통에 찐다. 이것을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되작되작 지져내면 된다. 사치라는 말 때문인지 힘든 줄도 몰랐다.
내가 요령이 없으니 제사음식 준비하는데 딸도 며느리도 의견을 내고 서로 머리를 맞대게도 한다. 딸은 꼬지를 찐 다음 밀가루를 입혀 계란을 묻혀 지진다고 한다. 다음에는 그렇게도 해 봐야겠다.
매년 할 줄 모른다고 힘들다고 제사 음식을 다 맞췄다. 직접 해보니 딸이랑 며느리랑 얘기할 시간도 많다. 며느리가 3년여의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했다. 제 사무실에 여직원이 저까지 세 명 있는데 저만 결혼을 했단다. 나이도 저보다 열 살, 일곱 살 많단다. ‘그 사람들도 결혼을 했으면 같이 시댁 흉도 보고, 시어머니 흉도 보고 재미있을 텐데 너 심심하겠다. 애들 키우는 정보도 얻을 수 있고.’ 딸은 선배들이 결혼했다고 원시인 보듯 왕따 시키는 건 아니냐고 묻는다.
딸이 방과 후 취미활동 반을 만드는데 수영반에 학생들이 몰려 가위 바위 보로 정했더니, 탈락한 학생의 엄마한테서 왜 가위 바위 보로 정했냐고 항의 전화가 왔다고 한다. 다시 제비뽑기로 하라고. 자기 아들이 이 게임이 제일 약하다면서. 엄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이렇게 직장생활의 애로사항도 얘기하고 들어 주면서 하다 보니 쉽게 끝냈다. 매번은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쯤은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는 것,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꽤 괜찮은 가족놀이인 것 같다. 시어머니가 준비할 때는 작은어머니들을 불러 떡 벌어지게 장만을 했었다. 동서들 간에 모여 소통하는 재미로 그랬을까.
식구들이 김치꼬지가 그중 제일 맛있다고 한마디씩 한다. 반찬가게에서 맞춰 올 때는 맛있다는 말이 없었다. “나 이제부터 약사 그만하고 요리사 할까?” 모두 웃기만 하고 부추기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걸 보니 내가 너무 오버했나 보다. 나만 신났지 딸도 며느리도 다음에 또 하자는 말이 없다.
사치란 주로 씀씀이나 꾸밈새 행사의 치레 따위에서 필요 이상의 돈이나 물건을 씀으로써 자신의 분수에 지나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김치가 반 통도 안 남았다. 풍덩풍덩 쓸 때는 좋았는데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까. 동생? 올케? 맨날 신세를 지는데.. 딸이 제 시어머니한테 얘기해서 한 통 얻어 주겠다고 한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갈 때 월급 들어온 기분이다. 나도 김장 백 포기쯤 담가 식구들이 모일 때, 한 채반씩 꼬지를 만드는 김치 사치를 해보고 싶다. 김치 많이 담그는 것이 부의 상징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