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숲교회 담임목사 강남웅

 고향을 떠나 공부하면서 생활비와 학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서울 동대문의 큰 책방에 아침 일찍 도착해서 전날 주문받은 외국어공부 교재나 영어회화 테이프 등을 지하철로 배달해 주고 수금해 오는 일이었습니다. 가슴높이까지 오는 바퀴달린 큰 가방에 책과 테이프를 가득 담고 하루 종일 탈 수 있는 무제한 일일승차권과 점심 식사비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던 하루,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근처 지하철역에 도착해 공중전화로 연락하며 서울의 낯선 곳들과 빌딩들을 찾아가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던 일은 무척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들은 살아가는 동안 참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가끔 서울에 갈 때면 걸어가고 들어가 보았던 거리와 건물들을 보며 많은 추억의 이야기들을 일행들과 나누곤 합니다. 배달 업무를 하던 힘든 시기에 저를 위로해주던 것이 있었는데, 지하철을 탈 때마다 승강기에 걸려있던 ‘사랑의 편지’라는 글이었습니다. 1988년부터 현대인들의 문화의식을 함양하고 이를 통한 인간다운 사회구현을 위해 시작되었다는 소개와 함께 역마다 눈에 띄는 곳에 부착되어 있었지요. 그 중에 이 재철 목사의 「춘화현상」이란 글이 늘 내 마음을 달래고 힘을 주었습니다. 옮겨 적어 봅니다.
 “호주 시드니에 사는 교민이 고국을 다녀가는 길에 개나리 가지를 꺾어다가 자기 집 앞마당에 옮겨 심었습니다. 이듬해 봄이 되었습니다. 맑은 공기와 좋은 햇볕 덕에 가지와 잎은 한국에서보다 무성했지만,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첫해라 그런가 보다 여겼지만 2년째에도, 3년째에도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처럼 혹한의 겨울이 없는 호주에서는 개나리꽃이 아예 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온을 거쳐야만 꽃이 피는 것은 전문용어로 '춘화현상'이라 하는데 튤립, 히아신스, 백합, 라일락, 철쭉, 진달래 등이 모두 이를 보인다고 합니다.
 인생은 마치 춘화현상과 같습니다. 인생의 눈부신 꽃은 혹한을 거친 뒤에야 피는 법입니다. 그런가 하면 봄에 파종하는 봄보리에 비해 가을에 파종하여 겨울을 나는 가을보리의 수확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인생의 열매는 마치 가을보리와 같아, 겨울을 거치면서 더욱 풍성하고 견실해집니다. 현실이 매우 어렵습니다. 노력을 해도 성공에 대한 확신은 없으며, 시간이 갈수록 미래는 더욱 어둡게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꽃과 열매가 맺히는 인생의 봄은, 추운 겨울을 지나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동토를 녹이는 따뜻한 마음과 희망으로 땅을 깨고 나오는 어린 새싹의 몸부림입니다.”
 군종장교로 근무한 20년 동안 병사들에게 인격지도나 강연을 하게 되면 ‘춘화현상’에 대해 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힘들고 무의미한 추운 겨울 같은 군 생활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지금 보이지 않는 식물에게도 겨울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꽃눈들은 가을에 미리 두꺼운 털옷으로 갈아입고는 그 속에 커다란 꽃망울을 숨긴 채 겨울을 보내다 봄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이렇게 인생의 꽃과 열매가 맺히는 인생의 봄은, 추운 겨울을 지나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동토를 녹이는 따뜻한 마음과 희망으로 땅을 깨고 나오는 어린 새싹의 몸부림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보이지 않는 시간들인 것 같지만 여러분은 숨겨진 보석입니다. 보석에 먼지가 쌓이고 조금 더러워졌다 해서 돌멩이로 변하지 않듯이 미래를 위해 함께 잘 준비하자고 늘 강조했습니다.
 페르시아의 한 왕이 신하들에게 슬프고 절망스러울 때에는 그것을 보고 위로받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또 너무 기뻐서 들뜰 때에는 그것을 보고 교만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것을 찾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충성스러운 신하들은 왕의 명을 따라 찾고 또 찾았습니다. 마침내 신하들은 반지 하나를 만들어서 왕에게 바치게 되었습니다. 왕은 그 반지를 받아 들고, 거기 새겨진 글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왕은 매우 만족해서 신하들에게 큰 상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 반지에 새겨진 글귀는 무엇이었을까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함께 꿈꾸던 모든 것들이 생각보다 기대보다 미진하고 답답함으로 인해 때로는 좌절하고 염려되고 있지는 않은지요? 성경의 전도서는 모든 일에는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의 사계절에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듯이 인생의 매 계절마다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다고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봄이 어느 새 우리네 주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봄은 '보다'의 명사형입니다. 자연은 세상에 봄직한 것을 내놓고 겨우내 숨죽였던 모든 사물이 기지개를 켜고 있음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써 내려갈 것입니다. 봄이 곧 겨울이 지키던 자리를 비집고 올라오고 있음을 곧 볼 것이라 기대합니다. 마찬가지로 고난을 많이 헤쳐 나온 사람일수록 강인함과 향기로운 맛이 더욱 깊은 것처럼 우리 국민들은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세계의 모범이 되는 사회를 이루리라 믿고 기대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