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아내 낡은 치마를 보내, 천리 먼 길에 애틋한 마음 전해 왔네. 오랜 세월에 붉은빛은 이미 바래, 늘그막에 드는 마음 서글픔 뿐이네. 마름질하여 작은 서첩으로 꾸며, 자식들 일깨우는 글귀를 적었다오. 부디 어버이 마음 헤아려 오래도록 가슴 깊이 새겼으면 좋겠소.」

정약용은 10년째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배에서 풀려날 조짐은 보이지 않고, 언제 집으로 돌아갈지 생각하기 어려웠고,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만 깊어졌다. 이때에 아내 홍씨 부인이 보낸 낡은 치마가 유배지 강진에 도착했다. 시집올 때 입었던 활옷, 곧 결혼 예복이다. 다홍치마 다섯 폭. 정약용은 아내의 정에 가슴이 뭉클해졌을 것이다. 그래서 한 가지 결심을 한다. 낡은 치마폭을 자르고 중국산 종이를 오려 붙여 아담한 서첩을 만들 생각이었다. 이 서첩을 두 아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서첩의 제목도 정했다. 하피첩 : 붉은 치마로 만든 서첩이라는 뜻이다.

정약용은 이러한 특별한 방식으로 아내와의 사랑을 회상하고, 아들에 대한 자신이 훈계에 애틋함을 더했다.

그의 문집에 『하피첩』 제작 경위를 기록한 글이 있다. 「하피첩에 제함」이다. 그중 일부를 살펴보자. 「나는 이것(활옷)을 잘라내어 조그만 첩자를 만들고 붓끝이 가는대로 훈계하는 말을 써서 두 아들에게 전해주었다. 훗날 그들은 내 글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양친 부모의 손때 묻은 자취를 바라보면 그리운 마음이 뭉클 솟아날 것이 아닌가.」

『하피첩』은 집안의 가보가 되어 대대로 전해지고, 후손들 삶에 지표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50년 한국전쟁의 와중에 분실되고 말았다. 그런 후 2005년 폐지 줍는 할머니의 손수레에서 다시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