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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윤복순 윤약국약사

오늘은 일본 이시카와현의 현도 가나자와시의 가나다라클럽의 회원들이 전주에 오는 날이다. 이시카와현은 전라북도와 가나자와시는 전주시와 자매결연을 맺은 곳이다. 가나다라클럽과 한일친선여성협회 전북지부와는 국제전통문화교류를 하는 모임이다.

작년에는 우리팀이 가나자와의 하꾸만코쿠 축제에 초대받아 갔다. 6월이라서 나는 못 갔다. 남편이 포도농사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작년에 갔었더라면 오늘 몹시 반갑고 기대도 많을 텐데 좀 아쉽다. 그렇지만 새 사람을 만난다는 설렘이 만만찮다.

2박3일의 행사 중에 한복 및 한옥체험이 있다. 나는 한복이 없다. 애들 결혼식 때도 빌려 입었다. 한복 입은 태도 안 나지만 무엇보다 족저근막염 때문에 항상 운동화만 신는다. 한복에 운동화가 어울리지 않아 고민 고민하다 남자한복을 입기로 했다.

한복을 빌리러 갔다. 모두 결혼 회갑 등 실내행사용이라서 옷감이 얇다. 한복을 입고 한옥마을 투어를 할 건데 추울 것 같다. 그리고 여간 비싼 게 아니다. 주인이 한옥마을에서 몇 시간만 입을 거면 야외용 싼 것으로 빌리라고 한다. 그것이 합리적이지만 따로 시간 내어 전주에 갈 수가 없다. 그날 9시부터 행사인데 몇 시부터 한복대여점이 문을 여는지도 모를 뿐 아니라, 내가 차가 없어 남의 차를 얻어 타고 다니는데 나 때문에 꼭두새벽에 출발하자고 할 수도 없다.

주변 사람들 중에 남자 한복이 있을 만한 사람을 찾아보았다. 공주 언니한테 전화를 했다. 한복은 있지만 내가 키가 작아 입을 수가 없으니 다른 사람 것을 알아봐 주겠단다.

K에게 생활한복 좀 빌려달고 하니 요새는 입지 않아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겠다며 한 번 찾아본다고 한다. Y는 자기 결혼할 때는 남자는 한복 입지도 않았다고 한다. 못 빌릴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확 밀려온다. 날은 겨우 이틀 반 남았는데.

저녁때가 되어 공주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리저리 알아봤지만 빌리지 못했다며 무용학원 하는 사람에게 농악단 한복이라도 빌려달라고 했으니 한 번 보자고 한다. K는 한복을 못 찾았는지 아무 소식도 없다.

부탁한 다음날이 되어도 감감무소식이다.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며 왜 부탁을 했을까 자책하는 마음이 생겼다. 얼마나 친한 사이여야 부탁을 하고 또 들어줄까. 나는 가진 것이 없으니 부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소소한 것은 자진해서 먼저 주기는 했어도. 한 동네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는데도 부탁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현실이 우울하다.

2주 전이다. 당연히 섬진강을 걸을 줄 알았는데 남편이 외국인 일꾼을 얻었단다. 포도밭에 거름도 주고 하우스 찢어진 것 교체도 해야지 겨울에 눈 오고 바람 불면 더 찢어진단다. 남편이 밉다. 배신당한 기분이다. 나의 기대를 이렇게 뭉개도 되나. 가뜩이나 2 주 동안 집안 행사로 섬진강에 가지 못했는데.

나는 거름 줄 지도 모르고 하우스 일은 더더욱 못한다. 그래도 밭에 가면 할 일이야 없겠는가. 외국인이 갔으니 방도 냉장고도 청소를 해야 한다. 그러나 빈정이 상해 ‘나는 밭에 안 가.’ 혼자 함라산 둘레길을 걷던지 장항의 국립생태원에 가겠다고 했다.

남편이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더니 일요일 천둥 번개가 치고 바람이 세게 불며 비가 온다고 한다. 나 혼자서 가는 것은 영 마음이 놓이지 않는단다. 이럴 때 내가 불러낼 만한 사람이 있는가.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없다. 익산에서 학교 다니고 이곳에서 내내 살았는데 아무 때나 불러 내 같이 할 친구 하나 없다니 서글펐다. 할 수 없이 ‘나 당신 따라 밭에나 가야겠네.’ 말소리에 힘이 없다.

내 욕심만 채우며 살면서 ‘나는 최선을 다해 산다.’고 자부해 오지는 않았는지. 남을 위해 내 시간을 써 준 일이 있는가. 항상 약국 문을 닫고 왔다고 남들에게 배려만 받았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되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지난 번 봉실회 모임에서 라오스에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봉실회는 남편이 군단에 근무할 때 여섯 가족 모임으로 30년 쯤 된다. 이제는 모두 퇴직을 했고 매년 한 번씩 외국여행을 간다. 라오스는 이미 갔다 왔기에 신바람이 나지 않는다. 호시탐탐 어떤 이유를 대서 다른 나라로 가자고 할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들은 모두 가지 않은 곳이다.

언제든지 불러낼 친구 하나 없음을 계기로 마음을 돌렸다. 나부터도 내 시간 내 돈은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 하는데 누군들 남을 위해 손해보고 싶을까. 모두 자기 이익을 위해서만 산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돌아갈까.

드디어 8일, 일본인들이 오는 날이다. 출근하자마자 공주언니의 전화다. 농악단 옷은 너무 후줄근해 못 입겠더라며 처음 하는 부탁인데 못 들어줘서 어떻게 하냐고 미안하단다. 가뜩이나 행동이 느린데, 한옥마을 지리도 잘 모르는데 허둥댈 일을 생각하니 이번 행사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비가 오니 약국도 한가하고 한복 걱정에 기분이 다운된다. 맥없이 밖을 보고 있는데 K가 가방을 들고 약국을 향해 걸어온다. 한복이다. 금방 얼굴이 펴지며 기운이 난다. 진심으로 고맙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3일 동안의 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마음껏 환영하고 즐기며 그들과 친해지자. 일곱 명이 오는데 한 사람만이라도 확실하게 알아두자.

나는 뒷북치기 선수다. 한복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아들 것 한복이 생각났다. 아들도 결혼식 때 입고 별로 입을 일이 없으니 집에 내려올 때 가지고 오라고 했으면 만사형통 이었을 텐데.

이 행사는 매년하고 한복은 그 때마다 입어야 한다. 모두들 여자 한복만 입으니 나 하나쯤 남자 한복을 입고 설명도 해주고 직접 보여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발뒤꿈치가 아파서 생각해낸 궁여지책이었지만 오히려 더 좋은 효과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금 그들을 만날 일과 3일 동안 같이할 여러 행사들로 달뜨고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