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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수목원에서

윤복순 윤약국약사

광릉수목원에 갔다. 근 2년 동안 그 앞을 지나다녔다. 매번 시간에 쫓겨 스쳐지나가야만 했다. 언제든 시간 내서 한 번 가봐야지 했던 곳이다. 그 실행이 오늘 이루어졌다.

30여 년 전이다. 경기도 포천의 모 사단에 남편이 참모로 근무했다. 우리는 주말부부였고 토요일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을 만나러 다녔다. 지금은 그 아이들이 커서 가정을 이루고 그 자녀들이 그 때 그 애들의 나이가 되었다.

이번 여름휴가를 산정호수로 정했다. 아들네, 딸네랑 같이 가기로 했다. 아들딸이 그 때를 기억하고 있다. 관사, 이동갈비, 백운계곡, 운전병아저씨, 짚차 탔던 일 등. 나도 감회가 새롭다.

익산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강남터미널에서 내려 상봉터미널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애들 둘 단속하느라 벌써 진이 빠지기도 했다. 상봉터미널에서 포천 가는 버스가 바로 있는 것도 아니니 애들은 언제 가냐고 보채고, 여러 시간 차를 타니 때로는 멀미를 하기도 했다.

얼마를 기다려 버스가 오면 우루루 먼저 타려고 난리가 나고, 나는 애들 때문에 늦게 타니 좌석은 없고, 사람들은 또 타고 또 타고, 애들 손을 잡고 설 수도 없을 만큼 만원이 됐다.

그런 차안에서 냉방도 잘 안 된 채로, 여름휴가를 강원도로 떠나는 차량으로, 구리를 벗어나는 데만 1시간은 걸렸다. 부대에서 내리면 얼마나 휘둘렸는지 애들이나 나나 거지꼴에 패잔병이 되어있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 것들이 울지 않아 고맙다고 장하다고 많이 안아줬던 기억이 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갑자기 부대에 행사가 있다고 해 밤기차로 서울에 갔고, 상봉터미널에서 첫 버스를 탔다. 터미널에서 덜덜 떨다 버스를 탔는데 난방이 되지 않았다. 얼어 죽는 것이 이런 것일까 실감이 났다. 첫 차라서 승객도 몇 안 되었는데 추워도 너무 추어 욕이 나오려고 했다. 나는 워낙 낙천주의자라 거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인데 그날 그랬다. 이럴 때 사람들이 욕을 하는구나, 처음으로 욕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었다.

여름이면 욕조에 물을 받아 놓고 남편은 그 안에서 몇 분이나 견딜 수 있나, 애들은 들어갈 수 있나 없나 내기를 했었다. 수돗물이 아닌 지하수라서 어찌나 차가운지 나는 바로 샤워를 할 수 없어 수건에 물을 묻혀 닦는 것으로 대신했다. 아이들이 크면서 수돗물이 미지근하게 나올 때면 포천 물 생각이 난다고 하곤 했다.

남편은 명화장 삼겹살이 맛있었다고, 미미향의 짜장면이 끝내줬다며 지금도 있다면 그 집에서 식사를 하자고 했다. 다들 나름대로 추억을 안고 포천여행을 계획했는데 사위와 며느리는 아무 추억이 없어 미안하다.

숙소가 속을 썩였다. H콘도에 예약을 했다. 평소에는 객실 두 개를 할 수 있는데 휴가철이라서 하나만 되고 하나는 대기 17번이다. 앞 번호라서 기대를 하고 다른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출발 일주일 전 까지 11번 까지 예약이 되더니 딱 멈춰버린다.

일주일 전 재예약을 했고 대기 19번이다. 여차하면 아들네와는 하루만 같이 보내자고 했다. 가뜩이나 애기들이 겨우 27개월을 넘겼는데 이 더위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노심초사하는 마음이다. 아등바등하지 않기로 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으면 된다. 출발 이틀 전 토요일은 예약이 되었다. 2박3일 중 1박2일만 같이 해도 이게 어디냐. 느긋해졌다. 출발 전 날 일요일도 예약이라고 연락이 왔다. 예나 지금이나 포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일정을 짜지 않았다. 무지무지한 이 더위에 세 살짜리 쌍둥이, 다섯 살짜리 쌍둥이 포함 손주 일곱에, 남편과 나도 이미 경로우대자가 아닌가. 그때그때 상황 봐가면서 쉬엄쉬엄 다니기로 했다. 원래 생각은 임진각 일대, 광릉수목원, 산정호수, 고석정, 헤이리예술마을 등이다. 예술마을은 안 가본 곳이라서 가보고 싶었다.

서대전에서 딸네와 합류했다. 구리를 어떻게 어디로 빠져나갔는지도 모르게 두 시간 남짓해 광릉수목원에 도착했다. 아들네는 손녀가 열이 나 병원에 들렀다 온다며 1시간 쯤 늦을 거란다. 그 사이 수목원을 둘러보고 숲 해설사의 얘기를 듣기로 했다. 숲 해설이 시작되자마자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더니 이내 소나기가 쏟아진다. 딸네와 아들네는 애기들을 데리고 비를 피하고 남편과 나만 숲 해설을 듣기로 했다.

TV에서만 보고 말로만 들었던 말굽버섯이 죽은 졸참나무에 주렁주렁 붙어있는 것도 보았다. 봄에 새싹이 날 때 어린잎을 씹으면 고추 맛이 나는 고추나무, 설악산 오세암의 동자승이 탁발나간 큰스님을 기다리다 죽은 곳에서 피었다 하여 동자꽃이라고, 꽃말이 기다림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런저런 설명을 하던 해설사가 눈을 감고 3분만 있으란다.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보라고 하더니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란다.

같이 듣던 사람들이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직장을 잡아 첫 월급을 받아 어머니께 모두 드렸을 때, 지금의 배우자를 만난 것,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아무 걱정도 없었을 때, 자식들을 만나고 해어지고 하는 순간들, 애기들을 키울 때 등등을 말한다.

내 차례가 되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 앞 사람들이 말한 그 때도 온 세상이 나의 것인 것만 같았지만, 남편과 자식들과 손자들을 죽 앞세우고 추억여행을 하는 지금도 나의 세상이다.

광릉수목원 가는 길이 뭐 그리 어려웠다고 30년이 걸렸을까. 미국가기 만큼이나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사단참모를 마치고 포천을 떠나면서 광릉수목원도 잊혀졌다. 십여 년 전 신문에 광릉수목원에 근무하는 연구원이 쓴 칼럼이 연재됐다. 가슴 저 밑에서 매주 그 앞을 지나던 때가 떠올랐다.

그 사이 딸 아들이 결혼을 하고 애기를 낳고, 나도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외국여행을 다니자, 잠시 국내여행을 접었다. 손자들이 아주 떡애기일 때는 감히 이런 가족여행은 생각도 못했다.

아들이 저의 애기들이 좀 클 때까지는 휴가를 국내로 다니자고 했다. 첫 번째로 잡은 곳이 포천이고 광릉수목원이다. ‘다시 광릉숲에서’ 가 연재되고 그 연구관은 수목원장이 되었고 광릉수목원이 국립수목원으로 이름도 바뀌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크게 재미있는 일도, 감동받을 일도 없는 나날이다. 맑은 숲속에서 잠시 행복을 생각해 보니 똑같은 일상, 즉 험한 일 없었다는 것이 바로 행복이고 지금 이 순간이다. 남편도 살아오면서 행복한 시간 많았지만 오늘 지금 이 시간이 의미 있고 행복하다고 한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도 지금 이 시간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지 들어봤어야 하는데, 비가 와서 같이 하지 못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