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토요일이다. 여느 때 같으면 일요일에 어디로 놀러갈까 여기저기 가볼만 한 곳을 찾을 텐데, 내일은 포도밭에 간다. 포도가 익으면서 열과가 생겨 그것들을 따내야 한다. 여름 내내 반복되는 일상이다. 휴가철이라서 약국도 한가하다. 이런 때 누가 나 좀 불러내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도 별 기대 없이 출근을 했다. 막 에어컨을 켰는데 전화가 울린다. 내가 좋아하는 S다. 오후 시간을 묻는다. 모든 예약을 다 작파하고라도 나가야할 판인데 아무 약속도 없다.

지난 4월 어느 날, 꽃들이 저 좀 봐달라고 귀염을 부리는데 제일 예쁜 오늘 꼭 보여주고 싶다며 후배가 데리고 간 곳이다. 작은 수목원인데 20년 동안 애지중지 가꿨다고 한다. 어느 것 하나 저절로 인 것 없이 주인의 손길이 가득가득 담겨있다. 그 주인장이 후배에게 차를 대접할 테니 친구들이랑 같이 오라고 초대했단다.

S랑 얘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약국이나 약사회 관련된 것을 묻기도 하고, 그녀의 상상력을 배우고, 반짝반짝하는 아이디어에 감탄하기도 한다. 그래서 만나면 활력을 얻는다.

수목원이 개원 1주년 기념행사를 한다고 한다. S는 수목원 사장한테 대접을 받을 만하다. 많은 사람들을 그곳에 데리고 갔고 또 소개했다. 오죽하면 사장이 약국에서 번 돈 자기네 찻값으로 다 쓰는 것 아니냐고 했을까. 나도 그녀 덕분에 그 곳을 알고 가 볼 수 있었다.

자연정원에 도착했을 때 뜬금없이 PD를 소개받았다.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눈이 커졌다. “너 TV에 나오니?” 그녀는 알았는데 나한텐 비밀로 했을까. 그래도 괜찮다. 내 마음이 기울어 호의를 가지고 있는 후배가 TV녹화 방송을 한다는데 내가 옆에 있어줘야지. 응원도 해주고 구경도 하고.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사장이랑 수목원을 찍으러 나가고 우리는 카페에 앉아 그간 못 다한 얘기를 나눴다. 녹음이 방자한 밖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녹색 들판으로 내 몸도 초록으로 물들었다. 경관 좋은 곳에서 맘에 맞는 후배와 대화를 나누는 신선놀음으로 마음은 학처럼 고고해졌다.

이때 사장 부인이 왔다. 나는 초면이고 후배와는 아는 사이다. 후배는 그녀와 만날 것을 알았는지 약사문예 책을 가지고 와 그녀에게 준다. 그 책 속에 내 글도 있다고 소개하니 그녀가 자기 시집에 사인을 해 나에게 주었다. 우리는 글 쓰는 얘기를 나눴다.

약국에 외출중이라고 써놓고 왔기에 후배가 빨리 녹화를 했으면 했다. 이때 마침 연출자를 다시 만났다. 후배만 찍는 게 아니라 나도 찍는단다. 우리는 수목원에 놀러온 손님으로 찻잔을 앞에 놓고 담소를 나누는 장면을 찍었다. 자연스럽게 얘기하라고 하니 여태껏 잘도 하던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잘하던 짓도 멍석 펴놓으면 안한다고 참으로 방안퉁수다.

나무동산을 내려오며 잠깐 동안으로 그곳에서 생기를 되찾은 모습, 800년 된 느티나무 앞에서 주인의 설명을 듣는 모습, 고목의 밑 둥이 텅 비어 있어 그곳에 들어가 사이좋은 친구 아니 선후배의 모습, 등등을 찍었다. 그리고 인터뷰도.

카메라를 의식하고 하려니 인터뷰도 쉽게 되지 않았다. 이 나이에도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헛된 욕망이 있는가보다. 살아온 대로 보여주면 될 터인데. 언제쯤이면 가식을 벗어낼 수 있을까. 사는 게 진솔하여 그자체가 예술이고 그림인 삶을 살아야 하는데.

돌아오는 길에 후배와 나는 어린애들 마냥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기분이 고양되었다. 우리는 갈 데까지 갔다. 그야말로 정점을 찍었다. 아무나 TV에 나오나, 감정이 정지 상태에서 활동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느꼈다. 이런 경험을 해봤다는 것이 재미있다. 특별한 날이 되었다.

그리고 어제, “약사님 그 수목원 어디예요?” “어머! 나 방송에 나오는 것 봤데?” 약국에 TV가 없다. 나는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하고 TV도 잘 보지 않는 편이다. 워낙 인물이 없고 뚱뚱하고 촌스러워 그런 내 모습을 화면에서 직접 보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그래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방송 날짜 지나가면 말로만 자랑하려 했는데. 실속 없이 과장을 해서 허세를 떨어보려 했는데... 아는 사람이 볼 줄 알았으면 얼굴에 파운데이션이라도 좀 발랐어야 하는데. 나는 언제나 이렇게 뒷북만 친다.

후배가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인터뷰는 나오지 않고 한 장면 한 장면 그림만 나온다. 자연스럽게 환하게 웃는 후배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자기 웃는 모습 아~주 예뻐, 넌 스타야.” 녹화하고 돌아오던 날처럼 그녀들의 웃음소리가 삼복더위도 휙 날려버렸다.

후배 덕분에 많은 호사를 누린다. 판소리를 배우러 다녔고, 칸타빌레약사 합창단 단원도 되었다. 차가 없는 나를 전주까지 꼭 데리고 다닌다. 내가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정식으로 등단을 할 수 있었고 지속적으로 쓸 수 있는 것도 후배 도움이 크다. 컴퓨터에 능숙하지 못한 나를 위해 문학카페를 소개해 주고 그곳에 글을 올릴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었다.

한여름 녹음방초를 눈에 꼭꼭 눌러 담았다. 그녀의 맑고 높은 웃음소리로 귀청소도 했다. 많은 이야기로 입도 풀었다. 처음해본 방송녹화는 사춘기 때 마냥 마음에 물결을 일으켰다. 휴가를 다녀온 것 보다 말이 많아졌고 목소리도 높아졌다. 여름을 즐길 수 있는 풍성하고 넉넉한 기쁨을 얻었다.

밋밋한 여름날 때맞춰 불러준 것만도 고마운데, 추억까지 하나 추가되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대화하고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너와 나의 공통분모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