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예총 익산지회장

김영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부딪치는 수많은 문제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나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치며 살아가는 어느 사회, 어느 곳에서나 갈등은 존재하기 마련이니 현대사회에서는 옛날의 전통사회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내용이 복잡한 갈등의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

농경시대에 우리 조상들이 경험했던 갈등들은 혈연이나 지연으로 연결된 좁은 범위의 사람들 사이에서 주로 발생하였다. 인구의 이동이 거의 없고 자급자족하는 생활양식에 의존했던 농경사회에서는 먼 곳의 사람들과 이해관계나 감정이 쌓일 이유가 없었으므로 여러 가지 갈등이나 접촉이 많은 좁은 범위 안에서만 일어났다.

혈연 또는 지연을 통하여 평소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 사이에는 두터운 정의가 생기기 마련이고 그 사이에 발생한 갈등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정의에 호소함으로써 해결하고 완화시킴을 비교적 쉽게 하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복잡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경우에는 옛날의 경우와 사정이 크게 다르다. 이해관계가 얽히는 범위는 넓고 복잡하니 면식이 전혀 없는 먼 사람들, 즉 각자의 자아의식과 권리 의식이 강해졌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

옛날에는 크지 않았던 일들이 이제는 새로운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즉 현대사회의 갈등은 농경사회의 그것보다는 규모가 크고 내용이 한없이 복잡·다양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면식이 없는 먼 사람들 사이에는 평소에 축적된 정의의 준비가 없으며, 설혹 가까운 사이에서도 옛날 농경사회에서와 같은 순수한 인정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현대사회의 각박한 분위기 속에서는 친화를 조장하는 따뜻한 정서보다는 분노와 증오 또는 시기심 같은 적대의 감정이 높아지는 까닭에, 감정의 우세가 도리어 사회적 갈등을 가속화시킬 경우가 많아진다고 판단된다.

오늘의 사회적 갈등은 온정이나 관용을 베푸는 따위의 감정적 처리로서는 해결될 수 없다. 공정 또는 합리성의 원리에 입각한 지성적 대화를 통하여 갈등을 해결함이 효과적인 것이라 믿어진다.

역사적으로 기록된 위대한 인물 가운데는 인간사의 갈등이나 문제점을 매끄럽게 풀어 해결하는 능력의 소유자가 적지 않으니 동서고금의 대철학자 즉 인류에 대한 깊은 사랑과 감정을 소유하고 갈등의 진상을 깊이 통찰한 지성의 소유자, 세계적인 예술가나 과학자도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냉철한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다.

높은 지성과 깊은 사고, 그리고 냉철한 판단력을 겸비한 화란의 유태계 철학자 스피노자를 생각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가 많은 유산을 남기고 유명을 달리한 후, 그 유산의 상속권은 당연하게도 외아들인 스피노자에게 있었다.

그러나 젊은 스피노자는 민족의 종교를 배반했다는 이유 하나로 유태교회로부터 파문을 선고 받음으로써 사회적으로 매장이 되었다. 이 같은 약점을 이용해 그의 누이와 매부가 그 유산을 가로채려 하자 스피노자는 법정투쟁으로 맞선다.

순리에 따른 그의 냉철한 판단으로 재판에 승소하고 그의 유산을 확보하게 되었으나 그는 그의 유산 대부분을 누이에게 주었으니 그것은 근친에 대한 깊은 사랑을 용서와 아량으로 입증한 행동이었다. 결국 스피노자는 그의 법정투쟁을 통하여 냉철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얻었고 누이에 대한 증여를 통하여 동기간에 깊은 사랑을 베풂으로써 갈등은 자연이 해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