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국예총 익산시회장

김영규

젊은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중년은 현실에 안주하고, 늙은이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산다고 했던가? 세월이 가면서 나이를 먹다 보니 매번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입에 붙어 다닌다. 심지어는 반복해서 뇌까리는 바람에 주위 후배나 제자들에게 피곤함과 스트레스를 선물하기도 한다.

나이 들면서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되며 어쩌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현재의 나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기억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실험에 의하면 동일한 사건이나 경험을 겪더라도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다르고, 그 기억을 되살리는 과정에 자신의 입장이나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억을 조작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이야기다.

자신의 기억을 믿지 않으면 닥쳐올 정체성의 위기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뒤틀리고 어긋난 기억이라도 맞겠거니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한다. 어찌 생각하면 살아간다는 것은 과거 기억에 대한 끊임없는 합리화를 통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이렇듯 불안정하며 가끔은 아니, 자주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집단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사건과 현상은 동일한데 이를 서로 달리 기억하는 집단이 생겨난다.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증인이 되어 자신들의 기억을 더욱 진실로 확신하게 만든다. 서로 다른 기억 집단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 그 서로 다른 기억들이 오늘에도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라는 말은 흔한 말이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그리고 귀중한 말들 가운데 하나이다. 사람을 인간(人間)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은 사람이라는 것은 본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마련인 사회적 존재임을 강력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데는 갈등과 마찰이 끊임없이 존재하며, 과거에 대한 기억이 서로 다르듯이 역사에 대한 기억 역시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원만한 대인관계 즉 인화(人和)가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은 불화와 갈등으로 가득 차있고 불신과 반목, 상대방 흠집 내기, 약점 부풀리기 등 우리 사회는 불안하다.

불화와 갈등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구 곳곳에는 전쟁 또는 준전쟁의 상황이 끊임없이 전개되고 있다. 인화와 평화가 결코 쉬운 목표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람들의 마음에 달려있는 문제임이 틀림없으나 실제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화와 평화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곳에 흔히 불화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단순한 이해관계의 대립만으로 불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우승을 위하여 기량을 겨루는 두 선수 또는 두 운동단체 사이에는 이해관계의 대립은 존재하지만 그들이 반드시 불화의 관계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과장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는 두 사람의 직장동료는 이해관계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사이좋게 지낼 수도 있다. 비록 이해관계의 대립이 있다 하더라도 감정의 대립만 없으면 불화에는 도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감정의 대립이 있을 경우 우리는 그 관계를 불화라고 말한다.

이해관계의 대립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감정이 좋지 않을 경우가 있으니 어떤 오해를 말미 삼아 서로 미워할 경우도 있고, 별다른 이유 없이 공연히 서로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더러는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에 대해서도 불만을 품기까지 한다. 결국 문제는 감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불화나 갈등은 생기지 않는다. 사회적 갈등은 어떠한 행태로든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계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난다. 서로 접촉이 잦을수록 친화(親和)의 감정이 생길 가능성도 많아지고, 갈등의 감정이 생길 가능성도 많아진다. 우리는 사랑과 미움, 친화와 갈등을 함께 느끼는 복잡한 인간관계도 흔히 경험한다.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고 규정한 옛 철학자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나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 이전에 감정적 동물이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