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복순 윤약국약사

일본 여행이 코앞이다. 다른 여행보다 우려와 설렘이 있다. 패키지여행이 아니고 달랑 네 명이 초대를 받아서 간다. 이런 여행은 처음이라서 기대가 되면서도 부담도 있다. 3박 4일 일정인데 1박만 호텔박이고 2박은 민박을 한다. 초대한 사람의 집에서 자는 것이다.

일행 중 한 명이 일본에서 대학교를 나와 일본어에 능통하다고 하니 그 사람만 믿는다. 나와는 일면식도 없지만 이번 참에 알게 된다. 이날을 위해 여름부터 일본어를 독학했지만 막상 일본에 갈 날이 닥치니 걱정이 앞선다. 쓸 줄은 전혀 모르고 읽을 줄은 눈곱만큼, 말하기는 아주 조금, 듣기는 혼자 내 발음으로만 해서 알아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민박을 한다는 소식에 집주인에게 조그만 선물이라도 준비해 가고 싶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일까. 아니 그 사람에게 요긴하게 쓰이면서 기억될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할까. 머리 쓸 일이 생겼다. 비타민제나 갖다 줄까. 태극선? 한지양말? 이것은 여름제품인데. 역시 쉽지 않다.

봄에 동네 아주머니가 옷을 뜨고 남은 실이라고 털실 한 봉투를 주었다. 자투리 실이지만 잘 맞춰 짜면 모자가 몇 개는 나올 수 있다. 한 땀 한 땀 직접 모자를 짜기로 했다. 동경에서 기사 및 가이드를 해 줄 무궁화공원 회장님, 잠을 재워주는 사이타마현의 회장님, 또 다른 한 집의 회원님 것. 세 개를 짜야한다.

마음이 바빠졌다. 시간도 촉박하다. 시간 날 때마다 약국에서 모자 짜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가끔 반찬이며 간식을 갖다 주는 할머니가 스카프를 가지고 오셨다. 옷집에서 두 장 얻었단다. 당신 딸도 있는데 나를 생각한 것이다.

모자를 보더니 색깔이 예쁘다며 호감을 보인다. 작년에도 하나 떠 드린다고 했더니 당신은 얼굴이 커서 모자가 어울리지 않는다며 손사래를 쳤었다. ‘아니, 이 양반이 시간 촉박한지 아셨나.’ 그래도 색깔이 맘에 든다는데 어찌 다음에 짜 드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얼른 드렸다.

토요일은 신문도 안 보고 모자만 짰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 인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한국의 윤복순입니다.’ 등을 일본어로 소리 내어 중얼거리며 한 바늘 한 바늘 짜는데 재미가 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즉부터 일본어 공부를 잘 해 두는 건데.

우리 아파트에 사는 일본인 아주머니가 요새 약국에 오지 않는다. 그녀 남편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에게라도 전화를 해야 할까 보다. 모자를 예쁘게 포장하고 쪽지를 붙이고 싶은데 일본글을 쓸 줄을 모르니 그녀에게 대필을 부탁하고 싶어 기다리는데 이렇게 애를 태운다.

한글로 쓰고 밑에 일본어로 쓰고 싶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인연 귀중하게 생각하며 내년에 한국에 오신다면 저희 집에도 초대하고 싶습니다. 우리 건강하고 행복하게 삽시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쓰고 싶은데.

익산에서도 공항 가는 리무진 버스가 새로 개통되었다. 일요일 순례길을 걸으러 전주에 가면서 공항버스표를 예매하려 하니 인천공항으로 직행해서 김포공항에는 서지 않는단다. 앞 집 처녀 믿다가 장가 못 간다고 이러다가 차표나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예매하지 않았다 열차로 간 적이 있다. 지하철이 5시부터 운행하는 관계로 용산역에서 30분 이상 기다렸고 공항 철도는 서울역에서 출발해 캐리어를 끌고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모른다. 새벽에는 기온도 많이 내려갈 텐데 이제야 마음이 바쁘다.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리무진 버스에 전화를 했다. 좌석은 있단다. 예매는 인터넷이나 현장에서만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인터넷에 취약하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라서 인터넷을 잘 모른다고 사정을 했다. 직원이 딱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름과 연락처를 묻는다. 계좌번호를 알아내 돈부터 입금했다. 안된다고 하더니 입금을 확인하고는 대신 예약해 주었다.

모자 하나를 한 가지 색으로만 짰더니 밋밋하다. 뭔가 포인트를 줘야 할 것 같다. 하트 모양을 수놓을까, 꽃을 만들어 달아야 할까. 생각만 있지 만들 줄은 모른다. 이때 전직 양호 선생님이 약국에 들렀다. 모자를 보여주며 이만저만 얘기를 하니 바로 장미꽃 한 송이를 만들어 턱 하니 붙여 준다. 모자가 확 살아났다.

이제 하나만 더 짜면 된다. 출발 날은 바짝바짝 다가오고 손놀림은 느리고 무엇보다 어깨와 손목이 아프다. 이러다간 밤샘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자투리 실을 이리저리 맞추며 모자를 만드는데 색 배합이 여간 예쁘지 않다. 그 색깔의 아름다움에 취해 약국에 사람이 들어오는 줄도 모를 때가 있다. 오는 사람에게 모자를 자랑하다 보면 어느새 아픈 것도 다 잊고 얼굴엔 생동감이 넘친다.

여러 실 묶음을 내놓고 이걸 먼저 넣을까 저색을 먼저 넣을까 궁리를 하고 있는데, 매일 약국에 들르는 동네 성(兄)이

“느네 집에 좋은 일 있을랑가 보다.”

“왜요?”

“니 얼굴이 이뻐졌어.” 한다. 살아보니 남을 위하는 것이 사실은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임을 알겠더라.

미적 감각이 뛰어난 아주머니가 모자를 보더니 밑이 검정색이니 윗부분에 검정 방울을 달면 훨씬 멋지겠다고 조언을 해준다. 방울을 어떻게 만들까. 뜨게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내일 오겠단다. 내일까지는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겨우 연락이 되어 일본인 아줌마가 왔다. 이야기 좀 하려는데 그녀를 찾는 전화가 빗발친다. 본론은 꺼내지도 못하고 그녀가 돌아갔다. 그녀가 한가한 시간에 다시와 쪽지편지를 완성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고 마음만 바쁘다.